[스포트라이트]
마성과 순수의 얼굴, <한니발 라이징>의 가스파르 울리엘
2007-03-08
글 : 김민경

영화사상 가장 지적이고 냉혹한 살인마, 한니발 렉터의 유년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피터 웨버 감독(<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과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는 젊은 한니발의 얼굴을 찾는 데 <한니발 라이징> 프로젝트의 사활을 걸었다. 숱한 유·무명 배우들이 오디션을 거쳤지만 앤서니 홉킨스가 인장을 새긴 세기의 악마에 걸맞은 청년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악의 씨앗’은 오디션장이 아니라 로렌티스가 우연히 본 프랑스영화 속에서 발견됐다. 1940년대부터 페데리코 펠리니, 비토리오 데 시카, 루키노 비스콘티 등의 영화를 만든 88살의 원로 제작자 로렌티스는 가스파르 울리엘을 처음 만나 눈을 맞춘 순간 인사도 잊고 외쳤다. “…너는 타고난 한니발 렉터구나!”

전편의 렉터 박사는 자기 완결적인 세계를 이미 갖추고 있지만 <한니발 라이징>은 트라우마를 안은 소년이 서서히 살인마로 완성되는 과정을 조명한다. 프랑스 미소년의 섬약한 얼굴은 막 움을 틔운 악마성을 그려넣을 깨끗한 도화지가 됐다. 어릴 적 생긴 왼뺨의 상처는 자칫 단조로워질 미모에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더했다. 해부실의 무영등 불빛에 반사된 하얀 얼굴은 창백한 기품을 발산하고, 유독 붉은 입술은 여유로운 냉소에 핏빛 질감을 더한다. “렉터 박사는 잔혹한 식인귀지만 풍부한 지성과 품격을 갖췄다. 그게 그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유인 것 같다.” 울리엘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한달의 준비기간을 앤서니 홉킨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데 보냈다. 홉킨스가 뱀과 고양이를 관찰하며 특유의 고요한 움직임을 차용했다는 사실을 참고한 그는 전문 코치에게 동작 지도를 받으며 렉터의 우아한 몸가짐과 정적인 ‘격조’를 몸에 익혔다. 곱게 머리를 빗어올려 얼굴선을 드러낸 젊은 한니발은 유려한 몸놀림으로 일본도를 휘두르고 나긋나긋한 손길로 잔인한 덫을 준비한다. 로렌티스는 자신이 ‘프랑스 억양의 렉터’라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울리엘의 캐스팅에 매달린 것은 그의 얼굴에서 곱상한 미모 이상의 “어떤 미스터리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해외에선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울리엘은 11년째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누벼온 프랑스의 유망주다. 스타일리스트인 아버지와 패션쇼 프로듀서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아역배우 매니지먼트사를 운영하는 어머니 친구의 눈에 띄어 12살 때 연기를 시작했다. 우연찮게도 울리엘은 주요 출연작에서 곧잘 전쟁의 포화에 휩쓸리곤 했다. 장 피에르 주네 감독(<아멜리에>)의 <인게이지먼트>에선 1차대전에 징집된 순진한 시골 소년이었고, 2차대전이 배경인 앙드레 테시네 감독의 <스트레이드>(Les Egares)에선 전쟁 과부(에마뉘엘 베아르)의 비밀 많은 연인으로 등장했다. 흙투성이 병사들 사이에서도 말갛게 빛나는 그의 얼굴은 때론 백치에 가까운 순박함을, 때론 위험한 성적 매력을 나르는 이중성을 지닌다. 극중에서 베아르, 공리 등 성숙한 여인의 간절한 눈빛을 한몸에 받았던 울리엘은 한편으론 남자들과의 오묘한 감정선에 썩 잘 어울렸다. 옴니버스 <사랑해, 파리> 중 구스 반 산트 감독의 단편 <마레 지구>에서 그는 인쇄소 청년에게 한눈에 운명을 느낀다. <라스트데이>(Le dernier jour)에선 남자 애인 문제로 가족에 균열을 일으키는 감성적 소년을 연기하기도 했다. 그동안 말수를 아끼는 연기를 주로 해왔던 그는 강렬한 감정을 표현해야 할 때일수록 대사가 없는 쪽이 더 편안하다고 느낀다. "왜냐면 모든 것은 두 눈에 있으니까."

투명한 순수와 비뚤어진 마성을 넘나들던 그는 니키 카로 감독(<웨일 라이더> <노스 컨츄리>)의 신작 <빈트너스 럭>에서 진짜 ‘천사’를 연기한다. 다르덴 형제 감독의 <더 차일드>에서 10대 미혼부를 연기한 제레미 레니에가 그의 수호를 받는다. 이제 막 국제적인 배우로의 본격적인 발돋움을 시작했지만 울리엘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 배우다. “나는 정말 느리게 전진해왔다. 내가 내 일을 명료하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건 그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한때는 감독을 꿈꾸며 생드니 대학의 영화학과에 진학했지만, 연기 경험을 쌓아갈수록 연출의 꿈을 긴 호흡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땐 연기보다 영화에 더 열정이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연출이란 정말 긴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시간을 들이는 성숙의 과정 자체를 즐기는 듯하다.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소년의 아껴둔 날개가, 자꾸만 궁금해진다.

사진제공 R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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