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왕뚜껑 소녀, 연기를 시작하다 <좋지 아니한가>의 황보라
2007-03-08
글 : 강병진
사진 : 이혜정

17살 소녀 용선에게 지구는 물음표로 가득 찬 별이다. ‘뵈요’가 맞는 건지, ‘봬요’가 맞는 건지. 사람이 쪽팔리면 죽을 수도 있는 건지. ‘cancle’은 ‘암’이란 뜻이 아니고 무엇이었기에 엄마가 이리도 화를 내는지. 무엇보다 용선에게 가장 큰 미스터리는 가족이라는 요상한 집단이다. 왜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같이 사는 걸까? 아예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좋지 아니한가>는 세상의 온갖 미스터리를 품은 용선이 큰 눈을 부릅뜨고 진실을 파헤치는 모험담과도 같다. 용선의 질문으로 문을 연 영화는 용선의 깨달음으로 문을 닫는다. 조금만 덤덤해지면 가족끼리 모여 사는 것도 좋지 아니하냐고. 5인 가족인 심씨 일가와는 달리 양친 부모 밑에서 외동딸로 자란 황보라에게도 가족은 언제나 이해하기 힘든 곳이었다. “우리집이랑 똑같아요. 속으로는 너무 사랑하면서도 입 밖으로는 절대 이야기 안 하거든요. 대부분 가족이 서로에게 무뚝뚝하고, 같이 하는 건 밥 먹는 일뿐이잖아요.”

CF와 시트콤, 심지어 연예인 사진들로 도배되는 각종 게시판에서 황보라는 큰 눈과 도톰한 입술을 먼저 보여주곤 했다. 음료 CF에서는 맛에 놀라 눈을 치켜떴고, 빙과류 CF에서는 CM송 박자에 맞춰 눈을 깜빡였다. 도드라진 입술은 그런 눈과 꼭 어울리는 화룡점정의 짝패였다. “외가쪽 식구들이 다 입술이 두껍고, 눈이 커요. 입술이 두껍다 못해 뒤집어질 정도로. (웃음)” <좋지 아니한가>에서도 황보라의 눈과 입술은 용선의 캐릭터에 한층 두꺼운 입체감을 포개놓는다. 단,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처진 눈과 뾰로통하게 내민 입술이다. 언제나 귀엽고 발랄한 캐릭터를 연기하던 그녀는 눈초리와 입술의 각도를 조정하는 것만으로 무덤덤한 용선의 얼굴을 그려낸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스무살이나 됐을까 싶은 외모일지라도 실제로는 스물다섯인 그녀가 17살 고등학생을 연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초반에는 감을 못 잡았어요. 교복만 입고 아이를 흉내낸 것이지 용선이가 아니었던 거죠. 나중에는 감독님이 제가 나온 모교에 파견을 보내기도 하셨어요. 학생들이랑 같이 먹고 놀면서 용선이를 찾아갔죠.” 예쁘면 안 된다는 감독의 주문도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녀에겐 날개가 되었다. “처음에는 감독님이 부르면 자세 바로잡고 눈 똑바로 뜨고 달려갔는데, 나중에는 용선이처럼 막 나가는 자세였어요. (웃음)”

극중 아버지인 창수의 대사에 따르면 용선은 “얼굴이 못생겨서 공부라도 잘해야 하는 아이”지만, 사실 17살의 황보라는 2천여명의 군중 속에서도 눈에 띌 만큼 매력적인 소녀였다. 부산 태생인 그녀는 어느 날 친구들과 삼겹살을 먹으러 가던 도중 차태현의 사인회를 기웃거렸고, 거기서 한 매니지먼트사의 명함을 받게 됐다. “동네며 학교며 최고의 이슈였죠. 차태현 매니저가 황보라를 찍었다고. (웃음) 하지만 한여름밤의 꿈이었어요.” 그러나 초등학생 때부터 미술을 공부하던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을 꿈꾸게 만든 계기로는 충분한 경험이었다. 가족과의 타협 끝에 방송사 탤런트 시험에 합격한 그녀는 이후 몇몇 드라마의 단역을 거쳐 왕뚜껑 CF에 출연했다. 거리에 떨어진 라면을 보고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리는 소녀. 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는 표정을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녀 자신은 진지하게 연기했단다. “정윤철 감독님도 그때 생각을 해보라고 하셨어요. 뭘 억지로 하려 하지 말고 진지하게 연기하라고.” 하고 싶은 대로 연기했던 시트콤과 달리 덤덤한 표정이 주를 이루는 용선의 캐릭터는 그녀에게 기분 좋은 숙제를 남겨주었다. “영화의 리얼리티는 또 다르다는 걸 배웠어요. 하지만 아직도 미스터리예요. 앞으로 연기생활을 하는 동안 평생 찾아야 할 답인 것 같아요.” 알아가야 할 것도 많고, 못해본 것도 너무 많아 행복하다는 그녀는 앞으로의 불안한 미래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모르는 게 많으면 많은 채로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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