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신자유주의 시대의 환상 만들기
2007-03-15
글 : 문강형준 (영화평론가)
감동적 영화에 담긴 치명적 이데올로기 <행복을 찾아서>

대개 매우 감동적인 영화들에 담긴 세계관 혹은 이데올로기가 훨씬 더 치명적이다.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의 <행복을 찾아서>가 바로 그런 경우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흑인 외판원 크리스 가드너(윌 스미스)가 계속해서 닥치는 가난의 ‘습격’에서 아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은 우리 가슴을 저리게 만들고, 집없이 전전하는 와중에도 증권회사 인턴사원이 되어 공부를 계속하다가 끝내 사원이 되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감동을 자아낸다. 이어서 나오는 자막이 그가 6년 만에 독립회사를 차렸고, 나중에는 백만장자가 되었음을 알릴 때, 우리는 그 ‘행복’한 결말에 미소 짓는다.

‘가난한 흑인이 백만장자가 되는’ 이 영화를 비판적으로 읽지 않을 때, 우리는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자명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그 메시지는 간단하다. ‘힘들고 지쳐도 열심히 뛰어라. 네 인생은 너만의 것이니 절대 포기하지 말고 변명하지 말라. 분명 나중에 너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 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식의 영화와 메시지를 너무 많이 봐왔고 보고 있다. 공중파 다큐멘터리들은 언제나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모습들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직장에서도 우리에게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면 언젠가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제퍼슨의 ‘행복 추구권’이라는 말은 가드너에게는 ‘잘사는 법’과 동일하다. 힘든 그에게 멋진 스포츠카와 미소 띤 정장의 회사원들은 선망의 대상이다. 그에게 ‘행복’은 그 얼굴의 미소이고, 궁극적으로는 그 미소를 있게 한 그들의 경제력이다. 주식 중개인이 되어 어떻게든 그들과 같은 자리에 서보려 하는 욕망이 그를 움직이는 힘이다. 사실 그를 가난에 빠지게 만든 ‘뼈 스캐너’ 외판업 역시 성공하고픈 그의 욕망이었다. 외판업이나 주식 브로커나 다를 건 전혀 없지만, 그는 그 동일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 영화가 감동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의 욕망을 천박하게 그리지 않고, 교육열이나 부정(父情)으로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성공하고픈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으니 그것을 비판하지는 말자. 하지만 ‘행복추구권’이라는 말은 크리스 가드너에게는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미국 역사 독립선언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삶, 자유, 행복추구권은 모든 인간의 자명한 권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가드너는 왜 그 “자명한 권리”를 그토록 죽기살기로 “추구”해야 하는가? 가드너가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이곳저곳 전전하며 사는 것은 그가 ‘자유’롭기 때문인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독립선언서가 규정하는데 왜 가드너는 백인들과 달리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 가드너는 이런 근본적인 물음을 절대 하지 않는다. 아니, 이 영화는 그 물음을 막는 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이런 보수적인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힘들다고 사회 탓하지 말고 너 스스로를 ‘업그레이드’시키라는 이데올로기가 이 영화의 핵심이다. 실제로 이 영화가 하는 일은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한 고전적인 선언을 신자유주의로 ‘업그레이드’하는 일이다. 이 영화는 빈부격차라든가 주택, 의료 등에 대한 문제들을 비판할 시간에 행복할 길을 찾으라고 말한다. 너 혼자, 아니면 아들과 함께. 영화의 배경이 된 80년대 초 레이건 시절은 미국에서 레이거노믹스로 불리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태동한 때다. 정부의 간섭(세금, 견인)은 주인공을 시련으로 내모는 장치이고, 히피나 노숙자는 도둑으로 그려지며, 성공한 사업가들이 멋지게 묘사되는 것은 이 영화의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드러낸다. 사회복지 예산을 삭감하고 기업에 무한자유를 허용하며 개인을 경쟁체제로 내몬 신자유주의는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형태를 띤다. 결정적으로, 우리의 주인공이 흑인이라니! 신자유주의 정책과 위선적 독립선언서의 최대 피해자인 흑인은 오히려 자기비판을 하라고 부추긴다. 즉, 흑인들도 노력하면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느냐는 말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가드너는 초등학교도 안 간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뭔가를 원한다면, 쟁취해. 그게 전부다.”(You wanna something, go get it. Period.) 이 장면은 영화에서 상당히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이 말이 이 영화의 철학이기도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는 아니다. 이런 대사는 전쟁터에서나 어울리는 말이다. 하지만 이 대사가 자연스럽게 들리는 까닭은 우리 삶이 점점 전쟁터를 닮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신자유주의가 이미 전면화된 한국사회에도 울림을 갖는다. 빈부의 격차가 깊어지고, 경쟁이 전쟁과 같고, 그래서 한번 실패한 자들은 다시 일어나기 힘들어진 이 세상의 메커니즘을 가리기 위해서는 ‘환상’이 필요하다. <행복을 찾아서>와 같은 영화는 그런 환상 역할을 충실히 해준다. 영화 속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모텔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부자가 지하철역에 앉아 있을 때, 아버지가 아이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공룡세상에 온 것처럼 행동하는 장면이다. 바로 그런 ‘환상 만들기’가 이 영화의 철학이고 이 사회의 철학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지독히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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