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극장가에서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는 참 희한한 시기다. 왜냐하면 가을과 겨울철이 아카데미상 후보작과 수상작의 독무대였다면, 여름철은 팝콘무비 즉 오락영화의 판이 되고, 봄철은 로맨틱코미디가 자리를 잡게 된다. 하지만 겨울과 봄이 경계를 이루는 지금 이때는 아카데미상 후보에 내놓기엔 약간 모자란 감이 있고, 그렇다고 확실한 블럭버스터영화도 아닌 애매모호한 작품들이 소개된다. 가끔 이 중에는 놀랄 만한 수작들도 찾아볼 수 있다.
최근 개봉작 중 눈길을 끄는 작품들로는 실제 연쇄살인범을 다룬 데이비드 핀처의 신작 <조디악>을 비롯해 <허슬 & 플로>로 명성을 얻은 크렉 브루어의 신작인 늙은 흑인 블루스 뮤지션(새뮤얼 L. 잭슨)이 섹스에 미친 백인 여성(크리스티나 리치)을 치료하기 위해 쇠사슬로 묶어놓는다는 황당한 설정의 <블랙 스네이크 모운>, 케이블 채널 <코미디 센트럴>의 시리즈로 컬트 입지(?)에 올라선 시트콤 <리노 911>의 극장판 <리노 911!: 마이애미>,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소설을 바탕으로 한 <300>,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괴물> 등을 들 수 있다. 골수 영화팬들에게는 인기를 끌 만한 작품들이지만, 홍보회사들이 일반인에게 어필시키기 위해서는 한참 머리가 아팠을 만한 영화들이 아닌가 한다.
이중 <조디악>은 <쎄븐>과 <파이트 클럽> 등으로 잘 알려진 핀처 감독이 연출하고 수없이 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하고 있지만, 영화광고에는 오로지 연쇄살인범 ‘조디악’ 이야기이며 인기스타 제이크 질렌홀이 나온다는 사실만 강조하는 등 일반 호러영화처럼 홍보돼 눈길을 끈다. 사실 <조디악>을 보통의 호러영화로 생각한 일반 관객은 속았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요즘 인기있는 호러영화처럼 피튀기는 잔인한 장면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영시간이 158분에 달한다. “<반지의 제왕>도 아닌데 상영시간이 왜 이리 기냐”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
하지만 <조디악>은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고 있다. 로튼토마토닷컴에서 <조디악>의 신선도는 무려 85%로, 아카데미상 후보작들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조디악>에선 핀처 감독의 전작들에서 볼 수 있었던 화려한 액션이나 특수효과 등은 볼 수 없다. 실제 살인사건이 발생했던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호러라기보다는 수사드라마와 스릴러에 가깝게 전개된다. 게다가 제이크 질렌홀은 물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마크 러팔로 등이 뛰어난 연기력을 과시해 158분이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다. 애매한 시즌인 초봄에 또 하나의 수작을 만나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