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가 웃으면 다같이 웃는 게 너무 좋아요
2007-03-14
글 : 강병진
사진 : 이혜정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서민정

그녀가 손에 턱을 괴고 어딘가를 바라볼 때, 세상은 모든 이치를 저버린다. 미친 개로 불리는 민용은 브래드 피트만큼 잘생겼거나 유재석만큼 웃긴 남자가 돼버리고, 그가 사준 자판기 커피는 순도 100%의 원두향을 내뿜는다. 그녀가 땅에 발을 디딜 때도 지구는 어찌나 기묘해지는지, 지금껏 운동하던 중력의 패턴을 잃고 기어이 그녀를 꽈당하고 넘어뜨린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은 그처럼 서 선생이 등장하는 순간, 잠시 현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다른 이들이 모두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낼 때도 그녀는 모든 것을 초월한 듯 그저 웃고 있거나 숨죽여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서 선생을 연기한 서민정의 첫 등장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시종일관 웃고 있고, 못 부르는 노래를 시켜도 열심히 부르던 서민정의 모습은 늘씬한 미녀 연예인들의 화려함 속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덕분에 그녀에게는 ‘순수해 보인다’거나 ‘착해 보인다’는 세간의 논평이 잇따랐고, 심지어는 양띠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연예인 등의 타이틀도 뒤따랐다. 이제는 그런 이미지가 그녀 자신도 물리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연예계 생활 7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자신의 이미지에 만족하고 있었다. “요즘 제가 가장 기쁠 때가 서 선생 역을 서민정이 안 했으면 누구도 못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예요. 그건 제 자신도 서 선생을 닮은 부분이 있지만, 평소의 제 이미지가 닮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순수한 이미지라기보다는 서 선생이나 저나 나이에 비해 세상 경험이 적어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거죠. (웃음)” 인터뷰 내내, 그녀는 서 선생의 언어와 몸짓으로 이야기했다. 약간 쉰 목소리로 “맞아요” 하며 맞장구를 치거나, “정말요?”라고 반문하거나, 숨넘어가도록 웃거나. 반말투로 정리하려던 인터뷰를 경어체로 바꿔야만 마음이 편할 정도였다.

-얼마 전에 큰 사고를 당했는데, 이제는 완쾌하신 건가요.
=거의 다 나았어요. 그런데 오늘도 빗길에 넘어져서 발을 삐었어요. (웃음) 평소에도 엄마가 너는 왜 신기하게 다리만 다치냐고 하세요. 안 그래도 이번에 사고를 당한 뒤에 검사를 받았는데, 제가 선천적으로 무릎이 약하대요. 평소에 좀 균형을 맞추기가 힘든 것 같아요. (웃음)

-평소 인터뷰에서 서 선생과 자신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요.
=저도 서 선생처럼 남들이 농담하면 잘 못 알아들어요. 실제 제 말 습관 중에 하나가 “정말요?”거든요. 남들이 농담으로 “어제 강호동이 흔들바위를 밀어버려서 흔들바위가 없어졌대” 그러면 진짜인 줄 알고 “정말요?” 그래요. (웃음) 그럼 사람들이 “뭐가 정말이야,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알고서 그러는 거야” 그러죠. 친구들도 순진한 척하지 말라고 그러는데, 정말 농담과 진담을 잘 구별하지 못할 뿐이에요. (웃음)

-서 선생의 행동습관 중 하나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주로 민용을 바라볼 때죠. 그것도 실제로 가진 습관 중 하나인가요.
=사실 평소에는 자신감도 있고 다른 사람을 잘 의식하지 않는데, 저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 서면 창피할 때가 있어요. 특히 밝은 데서 만나면 정말 부끄러워요. (웃음) 내가 너무 부족한 게 많은 것 같고, 이 사람이 나를 너무 볼품없게 볼 것 같고. 그래서 저 역시 얼굴을 가리거나 하는 습관이 많죠. 서 선생이 그러는 것도 민용을 너무 좋아해서 자신이 작아 보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몸 개그가 자연스럽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재밌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럽게 보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평소에 주위 사람들도 많이 안쓰러워하고, 겁을 내요. 저랑 다니면 항상 제가 다칠까봐 주시하는 편이죠. 고등학생 때도 눈내리는 날은 무조건 다치는 날이었어요. 어느 겨울에는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친구들이 그때 제가 좋아하던 남자애가 뒤에 오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쁘게 걸어보려고 했는데, 또 넘어졌어요. 너무 창피해서 그냥 그애가 지나갈 때까지 안 일어난 적도 있어요. (웃음)

-서 선생은 지금까지 맡은 배역 가운데 유일하게 연애다운 연애를 하는 캐릭터입니다. 처음으로 제대로 맡은 멜로연기가 힘들진 않았나요.
=연기를 하면서 항상 떠올리는 만화가 있어요. 김동화씨가 그린 <요정핑크>라고, 초등학생 때 너무 좋아해서 지금도 너덜너덜한 채 갖고 있는 만화예요. 거기에 보면 요정핑크가 원래는 키가 아기만큼 조그만해요.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앞에 서면 매우 성숙하고 예쁘게 변신하죠. 서 선생이 사랑을 하는 모습도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평소에는 자꾸 넘어지고 어설프지만 민용 앞에서는 진지한 모습을 보이잖아요. 그래서 저도 연기하면서 제가 요정핑크란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웃음) 무엇보다 노력하는 건 중심을 지키는 거죠. 제가 너무 웃기기만 해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진지하기만 하면 재미없거든요.

-서 선생은 몸 개그만큼 눈물 흘리는 모습도 많습니다. 항상 웃는 캐릭터만 연기하셨는데, 눈물을 흘리는 연기는 적응이 힘들지 않던가요.
=저도 제가 멋쩍어하면서 울 때가 있었어요. 이걸 내가 해도 될지 싶어서 자신없어하면 주위 분들이 얼굴에서는 울고 있는데 웃겼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사랑과 야망>의 세미를 연기할 때, 김병욱 PD님이 저를 보려고 드라마를 보셨대요. 아무래도 저를 잘 아시다보니 제가 우는 연기를 하면 왠지 제가 갑자기 웃을 것 같았다고 하시는 거예요. 처음에는 어색해서 그랬는데, 눈물 연기도 나중에는 몰입이 되더라고요. 요즘은 눈물 연기를 하기 전날부터 슬픈 음악만 듣고 있어요.

-<사랑과 야망>의 세미는 기존 이미지와의 충돌이 있는 캐릭터였습니다. 세미란 캐릭터가 본인에게 가져온 변화는 어떤 건가요.
=예전에는 어떤 역할을 맡아도 웃으면 다 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시청자에게도 서민정의 트레이드마크는 웃는 모습이니까요. 그런데 <사랑과 야망>에서는 한번도 웃는 장면이 없었어요. 항상 화로 가득 찬 질투의 화신이었죠. (웃음) 제가 잘하는 걸 못하고, 안 해본 걸 끌어내야 하니까 많이 힘들었어요. 하지만 지금 서 선생을 연기하면서 생각해보면 세미 때문에 진지해진 게 있는 것 같아요. <똑바로 살아라>의 노민정 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웃기만 하고 대본만 외워서 연기를 했거든요. 같은 시트콤이어도 지금은 연기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하고 있어요.

-TV에서 항상 웃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자랐을지 궁금해지곤 합니다. 집안 분위기도 매우 화목했을 것 같은데요.
=엄격한 부분도 있지만, 매우 자유로운 편이었어요.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온 가족이 함께 영국을 갔었어요. 그 이후로 가족끼리 단합이 잘된 것 같아요. 말도 안 통하는 타지에서 의지할 데라곤 가족밖에 없었거든요.

-사고쳐서 혼나는 딸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진짜 혼나진 않았어요. 하지만 돌발적인 행동은 잘했죠. 영국에서 학교에 들어갔는데, 애들이 영어 못한다고 놀리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 애들을 끌어모아다가 대장 맡고선 패싸움을 주도하기도 했어요. 집에서 태극기 가져와서 교실에 꽂아놓기도 하고. 그런 좀 엉뚱한 애였죠. (웃음) 한번은 학교에서 홍보모델을 뽑는데, 제가 뽑혔어요. 나름 자랑스러웠죠. 그런데 사진촬영을 할 때도 애들이 저만 뒤에 서 있게 하는 거예요. 그때 자전거 타고 있는 장면을 찍고 있었는데, 화가 나서 자전거를 집어던지며 애들을 때리기도 했어요. 제가 좀 욱하는 성격도 있거든요. 심지어는 집에서 된장을 가지고 가 애들 입에 밀어넣은 적도 있었어요. (일동 웃음)

-대학에서는 법학을 전공하셨습니다. 어떤 뜻으로 법학을 전공하셨나요.
=원래 초등학교 때부터 꿈이 아나운서였어요. 만날 혼자 신문 펴놓고 연습하고 그랬었죠. 그런데 어느 날 제 친구가 아나운서 시험 볼 때 문 앞에서 줄자로 키를 재는데, 거기서 165cm가 안 되면 떨어진다는 거예요. 또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인 거죠. (웃음) 아무래도 성인이 될 때까지 더이상 키가 클 것 같지가 않았어요. 그래도 말하는 직업을 갖고 싶어서 뭘 할까 고민하다가 뜬금없이 변호사를 떠올리게 된 거죠. (웃음)

-변호사가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네요.
=그렇죠. 하지만 처음부터 연예인을 꿈꾸었던 건 아니었어요. 친구 중에 연예인 지망생이 있었는데, 그냥 곁눈질로 보면서 흉내를 내보곤 하는 정도였죠. 그런데 어느 날 방학 때 집에 있는데, 어느 케이블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랑 VJ를 뽑더라고요. 아나운서에 지원하려고 이력서 들고 갔더니, 아나운서는 학교를 졸업해야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VJ쪽으로 지원을 해봤죠. 1명을 뽑는 과정에서 지원자가 1천명 정도였는데, 운좋게도 제가 뽑혔어요. 그쪽 선생님이, 인물은 저보다 못생긴 애가 없었는데, 쪽지 대본을 외워서 애드리브를 하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뽑았다고 하셨어요. 암기같이 단순한 건 잘하거든요. (웃음)

-여대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딸이 연예인이 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이 놀라진 않았나요.
=엄마는 신기해하셨어요. 요즘도 말씀하시길, 우리집에 끼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 평범한데 너는 어떻게 연기를 하고 있냐고 하세요. 아빠는 많이 좋아하셨죠. 사실 저희 아빠는 다정다감한 스타일이 아니세요. 무뚝뚝하고 무섭고, 아빠한테 혼나면 항상 엄마가 달래주는 식이었죠. 그런데 제가 연예인을 한 뒤부터는 만날 신문 오려서 상자에 담아놓으시고, 인터넷에 악플이 달리면 거기에 리플도 달아주세요. (웃음) 그래서 어떻게 보면 아빠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연예계 생활을 한 지가 어느덧 7년이 되었습니다. 후회한 적은 없었나요.
=물론 힘든 일도 많았고, 상처도 많이 받았죠. 하지만 저도 모르게 어느덧 7년이나 된 걸 보면 제가 약하면서도 강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잘 아는 감독님들도 민정이는 외유내강이라고 하세요. (웃음) 뭐가 저를 버티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몇 사람이라도 나를 좋아하면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제 주위 사람들이 저를 위해서 노력하는 걸 봐도 그렇고요.

-올해로 스물아홉이 되셨습니다. 서른을 앞두고 있는 심정은 어떤가요.
=마음은 스무살이에요. (웃음) 정말 저도 믿기지 않는데,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해요. 제가 하는 일이 항상 어설퍼서 사람들이 저를 어리게 보는 게 있어요. 그래서 이제 서른이 되면 나이에 맞는 역할도 해보고 싶고, 20대를 돌아보면서 30대를 계획해보고 싶기도 해요.

-마흔살의 서민정은 어떤 모습인지 상상해본 적이 있나요.
=10년이 빨리 가더라고요. (웃음) 저는 일반 사람들이 하는 거 평범하게 하는 거 다 하면서 살고 싶어요. 결혼해서 아이도 두명 정도 낳고 싶고요. 어쩌면 책임감없게 들릴지 모르는 이야기인데, 연기도 중요하지만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도 소중한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제가 앞일을 잘 걱정 안 해요. 그게 하면 할수록 일이 더 꼬이는 게 많더라고요. 많은 분들이 <거침없이 하이킥>이 끝나면 어떤 작품을 할 거냐고 물어보시는데, 아직 이것도 많이 남았잖아요. 얼마 전에 사고를 당하면서 많은 걸 느꼈어요. 몇 시간 뒤의 상황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먼 미래까지 걱정하는 건 우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캐릭터 측면에서 봤을 때 서민정이란 배우는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까요.
=저도 이제는 진지한 연기도 하고 싶고, 악역도 해보고 싶어요. 항상 웃던 사람이 뒤에 감춰진 악을 드러내면 더 큰 효과가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래도 시종일관 웃는 모습은 버리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은 저한테 꽈당민정 같은 거 이제 그만하고 싶지 않냐고 묻지만, 저는 좋아요. 제 자신이 원래 웃음이 많기도 하지만, 제가 웃으면 다같이 웃는 게 너무 좋거든요. 나중에 제가 낳을 아이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웃음)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