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가 독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최근 KnJ엔터테인먼트는 장진 감독의 신작 <아들>의 제작비를 대폭 절감하는 성과를 거뒀다. 인건비를 파격적으로 줄이고 한국영화 평균 촬영일수의 절반에 가까운 24회차로 촬영을 마감한 덕택이다. 주연배우 차승원과 장진 감독, 촬영이나 조명 같은 기사급 스탭들은 평소 개런티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을 받고 촬영에 임했고, 그 결과 애초 26억~27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총제작비는 20억4천만원으로 줄어들었다.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면서 생길 수익은 러닝 개런티의 개념으로 스탭과 배우들에게 최우선적으로 지급될 예정이다. 그러나 수익이 손익분기점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 더이상의 수익 분배는 없다. <아들>의 배급을 담당하고 있는 시네마서비스의 김인수 대표는 “최악의 경우에 손익분기점을 맞추지 못하면 애초 지급한 개런티로만 끝낸다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이 같은 제작비 절감 방식의 근본적인 개념은 배우들과 주요 스탭들 역시 영화의 흥행에 대한 위험부담을 제작사나 투자사와 함께 짊어지고 간다는 것이다.
시네마서비스는 향후 제작될 대작 <모던보이>와 <신기전>에서도 비슷한 방식의 인건비 절약을 통해 제작비를 축소할 계획을 갖고 있다. 먼저 통상적인 예산서와 25% 절감된 예산서를 동시에 뽑은 뒤, 절감된 예산서로 투자를 유치해 영화를 완성하고, 만약 손익분기점을 넘을 경우 차액을 가장 먼저 배우와 주요 스탭들에게 할당하는 방식이다. MK픽처스 역시 노근리 사건을 다룬 신작 <작은 연못>을 제작하면서 제작비 절감을 시험했다. 배우와 기사급 스탭뿐만 아니라 참여 업체들의 기여도와 현물출자 액수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다음 정교하게 지분 분배 테이블을 만드는 방식이다. 영화사들마다 방식에 있어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언정 제작비 자체를 낮추어야 한다는 의지만큼은 다를 바가 없다.
지난해 과도한 손실액으로 투자시장 꽁꽁
충무로 제작사들의 제작비 다이어트는 최근 한국 영화계에 드리워진 불안감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다. 지난 한해 108편의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수익을 낸 영화는 거의 없었다. 고작 열편 남짓한 영화만이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긴 가운데 편당 관객 수는 전년 대비 6.7%나 감소했고, 한류가 삽시간에 사라지면서 한국영화의 해외수출 규모 역시 전년 비교 68%나 축소됐다. 추정되는 손실액은 무려 1천억원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영화계로 흘러드는 자본의 경색이다. CJ와 쇼박스를 비롯한 메이저 투자사들은 올해 들어 새로운 작품에 대한 투자를 꺼리는 분위기다. 지난 한해만 108편의 한국영화가 개봉한 탓에 개봉일을 잡지 못해 올해로 밀려 있는 영화들을 올 상반기에 개봉시켜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신작의 촬영 편수 또한 눈에 띄게 줄었다. 오기민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정책위원장은 “양수리와 파주종합촬영소도 요즘은 한산하다. 도무지 일거리가 없다”는 말로 이 같은 현상을 설명한다.
메이저 투자사들의 경색국면에 따라 한국영화 투자 비율의 30% 정도를 담당해야 할 부분투자자들이 새로운 투자를 유보하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배급을 겸하는 메이저 투자사들은 어쨌거나 안정적인 수준에서라도 한국영화 라인업을 이어나가야 하는 형편이지만, 소액투자사들은 수익률이 급감한 현 상황에서 더이상 투자를 지속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물론 소액투자자들의 자본이 아직 완전히 충무로를 탈출한 것은 아니다. 유콘텐츠의 서영관 대표는 “자금 자체가 아예 고갈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지난 한해 개별 한국영화들의 기록적인 손실액이 모조리 펀드에 반영되다보니 소액투자자들은 예전보다 엄격한 기준을 갖고 더욱 신중한 태도로 투자에 임하게 된 것이다. 시네마서비스 김인수 대표는 “시네마서비스, CJ, 쇼박스 같은 메인투자사들도 돈을 못 버는 상황이니 소액투자사들은 더욱 갑갑할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투자하는 것 자체가 두려우니 뭔가 획기적으로 개선해달라는 요구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는 말로 소액투자자들의 위축된 심리를 전한다.
인건비, 홍보비 위주의 제작비 절감 모색
소액투자자들의 경색된 투자 심리를 풀기 위해서는 편당 수익률 자체를 높이는 일이 시급히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제작비 자체에 부풀어 있는 거품을 빼야만 한다. 하지만 할리우드처럼 스튜디오 시스템이 아닌 이상 카메라 대여비나 촬영 회차를 줄이는 방식은 당장 적용하기가 힘들고, 영화의 기술적인 부문에 투자되는 금액을 삭감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한국영화 편당 제작비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인건비의 거품을 빼내는 것만이 가시적인 제작비 절감 효과를 단기간에 보여줄 수 있는 현실적이고도 유일한 방법인 셈이다. 한 제작사 대표는 “한국 영화산업의 위기를 맞아 제작사를 비롯해 모든 구성원들이 고통을 분담해야 할 때”라면서 이러한 영화계의 자구 노력이 전제가 돼야 극장 부율 인상이나 극장 입장료 인상도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러한 ‘고통분담론’에 대해 매니지먼트계는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입장이다. iHQ의 박성혜 이사는 “영화시장이 전반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배우들 역시 탄력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우들의 경우에는 시장의 어려운 사정을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매니지먼트사가 솔직하게 털어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말로 매니지먼트계 내부의 움직임을 설명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고통분담론은 일시적인 고육책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출연작이 순익을 냈을 경우 충분한 공동 이익을 나눌 수 있는 제도적 마련도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박성혜 이사는 “지난해 대부분의 매니지먼트사들이 적자였다. 광고수익이 없는 영화배우들은 출연료가 개인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출연료가 삭감되면 매니지먼트사에는 더 큰 여파가 미친다. 어려울 때 돕는 것은 좋지만 잘됐을 때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나날이 치솟는 P&A 비용의 절감도 시급하다. 각 제작사들은 마케팅 비용의 거품을 걷어내기 위해 포스터 제작 등에 들어가는 구체적인 비용마저 면밀하게 재검토에 들어갔다. 영화의 홍보와 배급을 맡고 있는 메이저 투자사들도 마찬가지다. CJ엔터테인먼트는 얼마 전 개봉한 <드림걸즈>의 홍보비용을 3억원 정도 삭감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상무 부장은 “올해 상영될 한국영화 홍보비도 대폭 줄일 예정이다. 100만원짜리 광고 하나 집행하는 데도 신중을 기하는 상황이고, 행사 한번에 1천만원 이상 들어가는 제작보고회와 VIP 시사회 등도 줄여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개봉영화의 프린트 수도 마찬가지다. 이상무 부장은 “그동안 무조건 300~400개의 스크린을 통해 개봉하다보니 프린트값도 못 건진 스크린도 있었다. 한국시장 사이즈에 맞는 적정 스크린 수와 배급 편수를 찾아야만 한다”고 귀띔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제작비를 축소해야만 한다는 위기의식은 충무로 제작자들과 배급사, 극장주, 투자자들 사이에서 서서히 공유되고 있다.
소규모 제작사에 적용하려면 "시스템 뒷받침 되어야"
하지만 충무로의 제작비 절감 노력이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라는 의구심도 있다. 먼저 시네마서비스가 추진하고 있는 제작비 절감 방식은 영세한 소규모 제작사들에는 도입되기 힘들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한 충무로 관계자는 “강우석 감독은 파워가 있으니까 배우들과 스탭들을 불러다가 인건비 깎자고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다. 나머지 작은 영화사들은 그럴 만한 힘도 없다”고 토로했다. 소규모 제작사들은 임대료와 직원 월급을 지급하기 위해서라도 영화를 계속 만들어야만 하는 절박한 입장인 탓에 배우와 감독, 기사급 스탭들의 높은 개런티 요구를 거절하기 쉽지 않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오기민 정책위원장은 “영화계의 모든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실천할 수 있을 만한 제작비 절감 방식이 시스템적으로 뒷받침돼야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시네마서비스 김인수 대표는 “제작비 절감은 올해 영화계의 최대 화두다. 노조 협상으로 인한 제작비와 제작 시스템의 합리화와 투명화도 막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다. 거기에 걸맞게 제작비용을 줄일 수 있는 안을 영화계가 협의해나갈 것이며, 절대적으로 한국영화를 살리기 위해 동참들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한다. 제작자들의 본격적인 행보는 시작됐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도 최근 들어 제작비 절감을 화두로 다양한 방책을 강구하고 있다. 제협 안에서는 전체 예산 중 각 인건비 항목의 비율을 정하는 방안까지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제협 회장인 차승재 싸이더스FHN 대표는 “현재로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했지만, 손익분기점 자체를 좀 낮춰보자는 차원이다. 현실이 막막하니 연구를 한번 해보자는 거다”는 말로 제협의 움직임을 전하고 있다.
현재 제작자들이 중심이 돼 한국 영화계의 강력한 다이어트를 외치는 것은 단지 투자 위축 같은 현상 때문만이 아니다. 노조의 본격 활동 개시 등 한국 영화계가 새로운 시스템 속으로 진입하는 마당인 탓에 지금이야말로 체질개선의 적기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계 모든 주체가 제작자들의 해법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계의 시스템이 전반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각 주체들 사이에 형성된다면 해결책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결국, 이제 충무로가 준비해야 할 것은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커다란 논의를 펼칠 수 있는 아주 넓은 테이블이다.
강우석 인터뷰
“덜 위험해야 투자자가 나서고, 우리도 영화를 찍는다.”
-배우들과 기사급 스탭들의 인건비를 대폭 삭감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제작비 절감 방식을 추진한다고 들었다.
=돈 벌면 투자자와 제작자가 나눠먹겠다는 심보가 아니다. 순익이 생기는 대로 가장 먼저 돈을 채워주겠다는 거다. 개런티가 깎인 스탭과 배우들 입장에선 잔금을 좀 늦게 받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들이 원래 받는 금액을 좀 양보하고 들어가겠다고만 한다면, 돈을 버는 대로 우리가 나눠 먹는 것이 아니라 먼저 채워주겠다. 그런 거다.-어떤 상황에서 이런 방식의 절약을 추진하게 된 것인가.
=부가판권 시장이 죽은 상황에서 한국영화의 수익구조 중 극장매출이 90%를 차지하고 있지 않나. 제작비가 25억∼30억원 되는 영화들이면 100만∼150만 정도 수준이면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는데, 지금 상황으로는 그것도 어렵다. 극장에서 안 되면 100% 죽는 상황이다. 먼저 배우들과 스탭들이 개런티를 양보해줘서 고맙다. 우리 입장에선 차액을 나중에 지급할 수 있고 보너스까지도 줄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다.-앞으로 시네마서비스가 만드는 모든 영화들에 그런 방식이 도입되는 것인가.
=모든 영화의 제작비를 낮추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투자자 유치에 좀더 어려움을 겪는 영화들이 있다. 제작비가 큰 영화들이다. 우리 경우엔 <모던보이> <신기전>이 그렇다. 투자자 입장에선 데미지가 너무 크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럼 우리가 투자자를 보호해주자, 아낄 수 있다면 줄여보자, 양보할 수 있다면 한번 해보자, 뭐 그런 거다. 희생하고 동참하자는 거지. 사실 <실미도> 때도 그랬다. 많은 배우들이 그렇게 협조해줬고, 나중에 보너스로 보답했다. 설경구도 <공공의 적2> 때 그게 고마워서 금액을 얹어줬다.-하지만 제작비가 큰 대작들 같은 경우, 손익분기점을 낮추더라도 투자 유치가 쉽지는 않을 듯한데.
=상황이 어렵다고 대작을 안 찍을 수도 없지 않나. 그런데 요즘은 투자손실에 대한 우려 때문에 어떤 시나리오가 투자자한테 가도 움츠린다. 배우가 누가 나오더라도 투자 결정까지 한참 걸린다. 덜 위험하다는 걸 알아야 투자자가 나서고, 우리도 영화를 찍을 수 있다.-그 같은 제작비 절감 방식에 모두가 동의하는가.
=우린 그동안 합리적으로 해왔다. 손님 들었는데 보너스 안 들어간 적 없다. 돈 가지고 배우든 스탭이든 서로 얼굴 붉혀본 적 없다. 버는 건 공유하는 거다. 단순히 개런티를 깎아서 제작자와 투자자가 나눠 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이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