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겸손함과 지혜를 겸비한 배우, <씨 인사이드>의 하비에르 바르뎀
2007-03-22
글 : 정재혁

“삶은 권리이지, 의무가 아닙니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영화 <씨 인사이드>의 샘 페드로는 조용히 외친다. 사지가 마비된 채 침대 속에 갇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위해 세상과 맞선다. 어린 시절 바다에 몸을 던졌고, 수심이 깊지 않았던 관계로 몸에 충격을 받은 남자. 하지만 그 외침은 결코 선동적이지 않다. 잔잔한 바다에 물결이 일듯, 그는 “사회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삶”을 생각할 뿐이다. 안락사라는 논쟁적인 문제를, 샘 페드로라는 실존 인물의 삶에 녹여낸 영화. 그 속에서 바다의 정적을 연기한 배우는 스페인의 국민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이다. 출세작인 <하몽하몽>의 종마 같았던 모습을 생각하면, 55살의 중년 남성 샘 페드로는 결코 ‘바르뎀적’(bardemic)이지 않다. 짙은 흙빛의 머리카락은 숱이 많이 없어졌고, 넓은 이마와 강한 얼굴은 부드러운 윤곽으로 새 자리를 잡았다. ‘못생겼지만 멋지다(feo-quapo)’는 그만의 수식어도 이제는 바뀌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정치적인 문제를 부드러운 숨결로 이야기하는 화법은 30년이 넘은 그의 연기 인생을 어딘가 닮아 있다.

1969년 스페인의 카나리 섬에서 태어난 그는 배우인 어머니, 영화제작자인 할아버지 등 어릴 때부터 영화 친화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6살 때 영화 <엘 피카로>로 데뷔한 뒤 수많은 TV시리즈에 출연했고, 이후에도 가족들이 출연한 작품에 작은 역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배우로서의 인지도를 넓혀준 영화 <하몽하몽> 이전까지, 연기보다는 그림에 더 관심이 많았다. 마드리드 지역의 한 예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했으며, “재능있는 화가는 못 되겠구나”라는 판단 뒤에 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그는 “이상하고, 다양한” 분야에 발을 내디뎠다. 경비원과 일용노동자, 심지어 스트리퍼까지. 바르뎀은 그림을 떠난 마음을 종잡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헤맸다. 그리고 다시 연기. “연기가 그림보다 표현에 더 용이한 매체”라고 생각한 그는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하지만 할리우드와 대부분의 연예 관계자들은 그를 섹스 심벌의 라티노로만 바라봤다. <하몽하몽> 이후 그가 제안받은 역할들은 주로 남성 누드(beefcake)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비가스 루나 감독과 다시 뭉친 영화 <골든 볼>을 비롯해서, ‘입과 입을 맞추고’(Mouth to Mouth)란 제목의 <보카보카>,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라이브 플래쉬>와 폰섹스에 사로잡힌 영화제작자 이야기 <당신의 다리 사이> 등. 럭비 국가대표팀을 지낸 그의 육체는 강한 테스토스테론을 풍기며, 스크린을 장식했다.

하지만 바르뎀은 하나의 이미지에 안주하는 안이한 배우는 아니다. “한 가지 색깔의 역할을 계속하는 건 시간 낭비”라고 표현하는 그는 2000년에 출연한 영화 <비포 나잇 폴스>를 자신의 탈출구라 정의한다. 표현의 자유를 위해 검열과 구속, 동성애 혐오증과 싸워온 쿠바의 시인 라이날도 아레나스를 연기한 그는 이 역을 위해 30파운드를 감량하고, 2주간 쿠바를 방문했다. 영어를 사용하는 첫 번째 영화인 만큼 쿠바식 스페인어(Cuban Spanish)뿐 아니라 쿠바 악센트의 영어도 배웠다. “일단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했다. 쿠바 사람들을 만나 대화했고, 나이트클럽에서 성전환자들도 만났다. 내가 알게 된 사실들이 충격이었다.” 이 영화로 스페인 배우로는 처음으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된 바르뎀은 이후 할리우드의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는다. 2002년 존 말코비치의 <댄서 업스테어>에 출연해 다시 한번 영어 연기에 도전했으며, 2004년에는 톰 크루즈 주연의 <콜래트럴>에서 콜롬비아의 마약계 대부로 등장했다. 이외에도 현재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기다리는 영화로 코언 형제의 <노 컨트리 포 올드맨>과 마이크 뉴웰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 등이 있다. 올해 5월부터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신작 <게릴라>의 촬영에 들어간다.

베니스영화제 두 차례 남우주연상 수상, 스페인의 아카데미 격인 고야영화제 네 차례 남우주연상 수상 등 하비에르 바르뎀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라틴계 배우의 한축을 지탱하고 있는 존재다. 또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디에고 루나 등의 라틴 지역 젊은 배우들이 가장 존경하는 배우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모든 일에 겸양하고, 도전에 대범하다. “나는 좋은 배우가 아니다, 나쁜 배우도 아니다, 다만 괜찮은(okay) 배우”라고 말하는 그는 “영화는 속일 수 있지만, 연극은 그렇게 관대하지 않다. 나는 영어로 사랑해본 적도, 증오해본 적도 없다”는 이유로 존 말코비치가 제안한 영어 연극 <히스테리아>의 살바도르 달리 역을 거절했다. 20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출연한 <씨 인사이드>에서는 매일 다섯 시간의 메이크업과 열 시간 이상의 침대 신세를 감수했다. 자신이 거머쥔 수십개의 트로피에 대해서는 “상이란 에고(ego)를 채우기 위해, 허영(vanity)를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걸 빨리 잊지 않으면, 상은 곧 해가 된다”고 말했다. 연기가 주는 명예와 역할이 주는 이미지를 초월한 듯한 발언. 그의 말은 또한 가장 정치적이기도 하다. <비포 나잇 폴스>의 게이 역할에 대해 그는 “영화에서 사람을 죽이느니, 섹스를 하는 게 낫다”고 말했고, 영화제 시상대에서는 “연기를 하는 것도, 삶을 사는 것도 모두 정치적”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가장 격정적인 삶을 좀더 부드럽게 표현하는 솜씨. 투박한 육체가 뽐내는 빛을 과감하게 벗어던진 청년은 어느새 연기란 이름의 섬세한 정치를 구사하는 지혜로운 배우가 되었다.

사진제공 R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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