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개 같은 나라, 개 같은 경우
2007-03-29
글 :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
쇠창살에 갇힌 절망적 코리안 드림과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의 공통점

오늘 신문을 보니 경찰이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에 대해 ‘방화’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발표했단다. 확실한 증거는 없단다. “증거는 없지만 방화임에 틀림없다.” 이 얼마나 놀라운 문장인가! 있지도 않은 작가의 있지도 않은 인용하며 천연덕스레 그럴듯하게 말하는 보르헤스의 소설에 버금가는 놀라운 문장이다. 사실 이를 누가 반박할 수 있으랴! 화재현장도 감추어놓고, 감시카메라 테이프도 공개하지 않으며 하는 말이니, 우리는 그저 믿을 수밖에 없다. 피해자가 바로 가해자였다는 이 놀라운 역설은, 미리 알려지지 않아 반전의 묘미를 살릴 수만 있었다면, 정말 훌륭한 보르헤스풍의 소설이 될 뻔했다.

그런데 그는 왜 방화했을까? 왜 자신의 죽음을 야기할 사태를 ‘저질렀을까?’ “그는 원래 또라이였다”는 식의, 훌륭한 소설을 망칠 발상을 끌어들이진 말자. “그는 왜 범죄자가 되었나? 범죄자가 될 성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동어반복적인 답은 맹구 같은 봉숭아학당의 학생들에게나 어울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라스 폰 트리에가 미국을 모델로 만들었다는 영화 <도그빌>이 떠올랐다. 개(dog)들의 도시(ville) 혹은 개 같은 도시 이야기와 불로 징치되는 그 도시의 종말이. 천사처럼 착하지만 갱들에게 쫓기고, 나중엔 경찰에게도 쫓기는 그레이스는, ‘순박한’ 도그빌 주민들에겐 낯설고 위험한- 뭐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단 쫓기는 사람이니까- 이주자 혹은 외부자일 뿐이다. 한국인들에게 어두운 피부의 낯선 얼굴을 한 이주노동자들이 그렇듯이. 오랜 토론 끝에 그들은 자신들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대가로 그레이스에게 일을 시키기로 하고, 물론 약간의(!) 임금을 지불하기로 하고, 그를 받아들인다. 정말 오랜 ‘토론’ 끝에 이주노동자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던 한국처럼.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전극, 도그빌 혹은 코리안 드림

처음엔 일거리도 안 주려던 사람들이, 그레이스가 일을 잘한다는 것을 알고는 이 일 저 일 맡기기, 아니 마구 맡기기 시작한다. 그는 그 얼마 안 되는 임금을 모아 너무 비싼 가격을 붙여 안 팔린다는 인형들을 하나씩 사모은다. 그래서 사태는 잘 풀려가는 듯했다. 그는 임금에 대해서도, 엉큼하게 몸을 더듬는 노인네나 정말 싸가지없이 괴롭히는 애들에 대해서도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고, 그저 받아들여주고 그나마 먹고살 돈을 벌게 해주는 그들에게 고마워했을 뿐이다. 한국에서도 그렇지 않았던가. 혹시 그들이 한국의 노동자들 일자리를 뺏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그들을 받아들이길 주저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그들은 한국 사람들이 하려고 하지 않는 위험한 일, 더러운 일, 힘든 일을 열심히 맡아 하려 했기에 그들 없인 한국의 공장들이 돌아갈 수 없을 정도가 되지 않았던가? 그레이스 없는 도그빌을 생각할 수 없게 된 것처럼.

그런데 사태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한다. 어느 날 경찰이 와서 그레이스의 얼굴이 그려진 수배자 포스터를 붙이곤 이 여자를 보면 신고하라고 하고 간다. 도그빌 주민들은 다시 회의를 열어, 더욱 위험해진 대가로 임금을 더 낮추고, 일하는 시간을 더 연장하기로 한다. 불법이라는 딱지가 붙은 이주노동자들을 한국의 사장님들이 턱도 없이 싼 임금을 주기로 하고 좀더 격하게 욕을 하며 노동시간을 연장시켰듯이. 아니, 도그빌은 약과다. 한국의 사장님들은 그들의 신분이 경찰이나 단속반에 쫓기는 신세라는 걸 이용해 그나마 낮은 임금을 주지 않거나 떼먹기도 하며, 일하다 다치면 치료해주는 게 아니라 내쫓아버리기 일쑤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수배자가 된 이후 이제 도그빌 주민들은 그레이스를 더욱 학대하기 시작했고, 그가 쫓기는 신세란 걸 이용해 자신들의 더러운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며, 급기야 경찰이 닥치자 그걸 이용해 그를 겁탈한다. 애새끼들도 더 싸가지없이 굴기 시작하고. 그레이스를 번번이 범하던 남자는 그 장면을 목격당하자 그레이스가 유혹해서 그랬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레이스는 사실을 말하지만, 남자의 부인도 그 옆의 어느 누구도 불법적 신분인 이 불행한 외부자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최대의 피해자가 거꾸로 가해자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리곤 그레이스에게 자신이 유혹했음을 ‘자백’하라고 요구하며 부인할 때마다 그레이스가 사모았던 인형들을 하나씩 깨부순다. 인형들이 하나하나 깨져나갈 때마다 그레이스의 삶의 희망도 하나씩 깨져나간다. 이 얼마나 잔인한 형벌인가! 우리도 그러지 않았던가? 임금을 떼여 신고를 하면 임금을 안 준 날강도 같은 사장님들은 그냥 둔 채 임금을 못 받은 이주노동자를 잡아 가두거나 내쫓아버리는 게 한국의 공무원들 아니신가? 심지어 사기를 당해서 당사자를 잡아 경찰에 끌고 가면 거꾸로 이주노동자를 불법혐의가 있다고 잡아가두는 게 한국 경찰 아닌가? 그러면서 그 모든 잘못이 불법체류에 있다고 하여 피해자를 모두 쫓기는 범죄자나 가해자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던가? 그리곤 ‘보호소’랍시고 만들어놓은 수용소에서 밀린 임금 포기하기를 기다려 강제출국시켜버리지 않았던가? 그들이 싼 임금과 개 같은 욕설, 갖은 수모와 신체적 고통, 거기다 쫓기는 신세의 고통마저 감내하며 삶을 지속하게 했던 희망에 대해 단 한마디의 질문도, 한번의 사려있는 배려도 하지 않은 채 그 모든 것을 그 잘난 ‘법’의 이름으로 깨버리고 있지 않았던가? 법조차 희망 아닌 절망의 상징이 되어버린 곳, 그게 바로 ‘외국인보호소’ 아니던가?

선량한 주민들 혹은 한국인들의 끔찍한 만행

그러나 사실 <도그빌>에서 더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모든 끔찍한 만행이 경찰이 아니라 경찰의 시선을 이용해 일반 주민들이 저지른다는 사실이다. 우리라고 이보다 나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불법 신분임을 이용해 임금을 깎고 임금을 떼먹고 손목이 잘려도 병원이 아니라 경찰서로 데려가는 끔찍한 주민들 혹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자임을 알기에 함께 일하면서도 쉽게 욕하고 쉽게 때리는 이 끔찍한 주민들, 그게 바로 그들이 만나는 대다수 한국인들 아닌가?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 그레이스는 이제 도그빌을 떠나고자 결심한다. 그러나 그렇게 싼 임금에 부려먹고 쉽게 겁탈하고 내키는 대로 화풀이하는 이 ‘편리한’ 타자, 이 만만한 외지인을 어찌 쉽게 놓아줄 것인가? 탈출하려던 트럭 운전사에 속아 돈 뜯기고 겁탈당한 채 다시 마을로 돌아온 그레이스를 붙잡아놓기 위해 이제 도그빌의 저 개 같은(개들이여, 이 통상적 은유의 무례와 무지를 용서하시길!) 주민들은 쇠사슬과 말뚝으로 그레이스를 묶어놓는다. ‘보호’를 자처했던 도그빌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외국인‘보호소’에서도 그러지 않았던가? ‘보호’를 위해 쇠창살을 둘러치고 도망갈까 싶어 감시카메라로 24시간 감시하며, 심지어 화재가 나서 병원에 실려온 사람들마저 병상에 수갑을 채워 묶어놓은 저 보호소의 관리들이 저 개 같은 도그빌의 주민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마지막 남은 연인에게서마저 배신을 당한 그레이스가, 연인의 신고로 찾아온 마피아, 아니 아버지의 힘을 빌려 선택한 것은 도그빌에 불을 지르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죽이는 것이었다. 새로 시작한 삶에 걸었던 자신의 희망을 하나씩 깨부수었던 여편네의 싸가지없는 아이들도 자신의 아이 같은 인형들이 부서졌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처형한다.

불살라지며 끝나는 라스트신까지 우리는 <도그빌>을 닮았다. 다만 다른 것은 도그빌에선 개 같은 주민들이나 개 같은 마을(dog-ville)을 불태우며 징치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반해 한국에서는 그 불마저 절망 직전의 이주노동자들을 덮쳤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들은 “증거는 없지만” ‘보호소’를 불지르는 범죄자로, 가해자로 다시 둔갑해야 했다. 어떤 말할 권리도 얻지 못한 채. 삶에 대한 처절한 절망을 불사르는 극적인 역전은 역시 영화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그리하여 도그빌은 징치되고, 절망은 불살라져 새로운 희망에 거름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어떤 끔찍한 만행도 징치되지 않았다. 절망은 노인의 얼굴을 덮어가는 검버섯처럼 어두운 이주노동자의 얼굴에 더욱더 넓게 퍼져갈 것이며, 희망은 절망의 땅을 가리는 허구의 형태로 살아남아 또 다른 이주노동자들을 유혹하는, ‘절망의 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개같이 살지 않기 위해서는

마지막에 그레이스는 모두가 불탄 그 자리 한편에 살아남은 모세라는 이름의 개에게 손을 내민다. 보이면 보이는 대로, 들리면 들리는 대로 짖었던 그 솔직함이 차라리 법과 도덕으로 자신을 은폐한 채 갈취하고 강탈했던 인간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개 같은 도시의 개 같은 인간들 사이에 개 같지 않은 오직 하나의 존재는 개였던 것이다. 내가 이 끔찍한 개들의 나라에 살면서도 희망을 아직 잃지 않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저런 존재, 저런 뜻밖의 배역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도그빌 같은, 아니 도그빌보다 더한 이 땅에서 내가 개 같지 않게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는 것은, 차라리 도그빌의 외부자로 살았던 저 개처럼, 자신이 태어난 이 땅을 낯설게 여기는 외부자로 살아갈 가능성마저 사라진 건 아니라는 믿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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