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지혜와 민지혜. 예명을 가진 연예인은 많다. 그럴싸해 보이는 예명이 의외로 유치한 의미를 갖는 경우도 많다. 연예계에 들어오며 새로 짓는 예명은 작명 시기보다 작품이 쌓인 뒤, 이미지가 형성된 뒤, 의미를 갖는다. 왕지혜란 이름의 여배우 민지혜도 지금은 단막극의 여주인공이나 CF 모델, JTL, 클릭B 뮤직비디오의 여자일 뿐이다. 신인이란 이름이 민망할 정도의 연기 경력을 갖고 있지만, 배우라는 이름은 쑥스러운 정도. <뷰티풀 선데이>에서 상처를 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여자 수연은 그런 의미에서 민지혜란 이름의 새로운 출발점이다.
고등학교 시절 연예계 데뷔를 준비하며, “왕씨가 너무 센 어감”이란 이유로 성을 바꾼 민지혜는 길거리 캐스팅과 잡지 모델로 활동을 시작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연예인, 배우의 꿈을 가지고도 장래희망란에 다른 직업을 적을 정도로 소심했지만, 학교까지 찾아온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의 캐스팅 제의에 선뜻 응하며 용기를 냈다. “처음 프로필을 찍고 돌리면서 여러모로 진행이 잘됐어요. 운이 좋았죠. 하지만 그때는 누구나 다 그런 줄 알았어요.” 오디션과 낙방, 기다림의 고통없이 그녀는 CF 촬영과 모델 일로 바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김재원과 함께 출연한 한·중 합작드라마 <북경 내사랑>과 이후 전 소속사의 중국 관련 사업으로 인연이 닿아 출연한 두편의 중국 드라마 <생사절연>과 <서울연가>. 중국어 대사에 한국말로 대사를 치는 연기와 한국에 대한 향수가 조금씩 힘들어질 무렵, 그녀에게 “뭘 해도 전혀 안 되는” 시기가 찾아왔다. “그냥 힘들고, 문제도 꼬이고, 위축됐어요. 그만할까, 라는 생각도 했죠.” 하지만 틀기만 하면 나오는 TV 속 연기와 극장에 걸린 포스터는 그녀가 영화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게 했다. “고3 때 <베스트극장>을 한편 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긴장이 되면서 즐겁고. 극중 인물을 상상하고, 그 감정을 표현한다는 게 신나더라고요.” 특별한 출연작 없이 힘들게 보낸 2004년과 2005년. 민지혜는 전 소속사의 문제까지 겹쳐 생애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선천적으로 시련 앞에 고민하거나 오지 않은 미래를 힘들어하는 성격은 아니다. 학창 시절 해보지 못한 것들을 뒤늦게 경험하고, 친구들과 오랜만의 수다를 즐기면서, TV단막극 <계룡산 부용이>와 <불량소녀> 출연으로 도전의 폭을 넓혀갔다. 도인 역으로 출연한 <계룡산 부용이>에서는 두달간 태껸을 배웠고, <불량소녀> 때에는 액션스쿨에 다녔다. “개인적으로 강단있고 근성있어 보이는 배우가 좋아요. 제가 그런 모습으로 나오는 것도 좋고요. 처음엔 그런 역할들을 내가 할 수 있을까, 의문도 있었지만 지금은 만족해요.” 도전에 대범하고, 실패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 그 자세로 2006년에 집어든 작품은 영화 <뷰티풀 선데이>다. 3차 오디션을 통해 수연 역에 낙점된 민지혜는 당시의 상황을 “감동”이라고 표현한다. 한편의 영화를 오디션부터 언론 시사, 이후 홍보까지 경험하고 있는 그녀는 요즘의 일상이 “생소하지만 재미있다”. “제가 이 작품을 해서 다른 배우분들이나 감독님께 해를 끼치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하고 싶은데 겁이 난다고 하지 않는 건 너무 바보 같잖아요. 지레 겁먹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죠.” 그녀가 연기한 여자 수연은 강간의 경험을 기억 저편에 묻고 살아가는 강인한 여성이다. “시나리오 받아보고 처음엔…. (웃음) 읽기가 힘들었어요. 수연을 폭행한 민우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녀는 결국 한편의 영화를 통해 감정의 양극을 오간 한 여인의 일생을 통과했다. 영화의 언론시사 이후 반응을 체크해봤냐고 질문하자, 돌아온 반응은 의외의 섭섭함이다. “제 기사엔 댓글이 안 달리던 걸요? (웃음)”
스크린이나 신문 속 자신의 모습이 아직은 신기하고, 함께 연기한 박용우와 남궁민에 비하면 자신의 노력은 “갈 길이 멀었다”고 고백하는 그녀. 하지만 민지혜는 “감정의 폭이 큰 장면보다 간단한 대화”를 더 고민하고, 병상에 누워 발밖에 보이지 않는 장면에서도 “대역은 생각조차 안 했다”며 연기에 대한 진지함을 내보인다. 연기에 대해서는 “없으면 이상하고, 안 될 것 같아서, 물과 같다”고 설명한다. 안경을 벗고, 성(姓)을 고쳐쓴 뒤, 영화를 만난 그녀. 민지혜는 지금 아직은 생소한 이름 세 글자를 대중의 뇌리 속에 열심히 그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