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을 보다 속으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얼마 만에 보는 노골적 백인 우월주의인가’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씨네21> 홈페이지와 포털 사이트를 뒤져보니 역시나 활발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입장과 영화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봐야 한다는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고 별 반개부터 별 다섯개까지 영화에 대한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렸다. 이번호 독자면을 찬반논쟁에 할애한 것은 그래서다. 나로 말하면 영화를 볼 때 정치적 함의에만 매몰되면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300>을 보면서 정치적 의미를 지우고 즐기는 일은 불가능했다. 정치적 의미를 따져보는 흥미를 빼고 <300>을 보라는 건 피 한 방울 흘리지 말고 살만 1파운드를 떼어가라는 <베니스의 상인>식 판결과 다를 바 없다. 나의 뇌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일까? 주변부 아시아인의 콤플렉스나 피해의식이 작동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그렇다고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백인 중산층이 될 리 만무하니 콤플렉스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나 같은 뇌구조를 가진 사람들 눈엔 그런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들이 참으로 신기하다.
<300>을 둘러싼 논란이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엔 <300>에 관한 여러 반응을 소개한 기사가 났다. 이란 정부는 <300>을 심각한 군사적 위협으로 받아들였고 <뉴욕타임스>는 “(멜 깁슨의)<아포칼립토>만큼 폭력적이고 <아포칼립토>보다 두배 멍청한 영화”라는 혹평을 썼다고 한다. 반면 미 서부에 주둔한 한 해병대에선 <300>을 보며 열광의 환호성을 질렀단다. 기사는 죽음을 최고의 영광이라 믿는 스파르타 결사대의 모습을 아랍의 자살특공대에 비교하면서 <300>을 거꾸로 읽을 가능성도 제시하고 있지만 어딘가 궁색하다. <300>은 아무리 전복적으로 읽어봤자 어리석은 용맹함에 대한 찬양으로 귀결된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는 믿는 세상은 아무래도 파시스트와 테러리스트의 천국일 것이다. <300>을 보면서 떠올리게 되는 것이 국제정치에 대한 비유만은 아니다. 영화는 제 피붙이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친 백인 몸짱의 반대편에 괴물, 기형, 불구, 동물, 흑인, 아시아인, 피어싱, 게이를 전시한다. 불구로 태어난 아이는 버린다는 스파르타의 율법부터가 소름끼치는데 기형으로 태어난 에피알테스가 스파르타를 배신하는 대목에 이르면 일관성있는 외모차별주의에 감탄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300>은 스파르타의 율법을 비판하는 대신 에피알테스를 정신도 신체를 닮아 비뚤어진 자로 비유하며 비난한다. 눈치 보지 않고 뻔뻔한 <300>의 도상학은 80년대 <람보>나 <록키> 시리즈도 울고 갈 만하다.
역사적 사건이 있고 원작자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이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그래도 100년 넘는 역사를 통해 정치적 공정함이라는 감각을 발달시켜왔다. 인디언이 악당으로 등장하지 않는 서부극을 만들기까지, 흑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내놓기까지 지난했던 역사를 돌아보면 <300>이 보여준 정치적 불공정함은 기념비적이다. 백인 우월주의의 도상학 교본으로 손색없으며, 우파 선전영화라는 딱지를 붙여도 하등 억울할 것이 없다(헬스클럽 홍보용 CF로도 괜찮다). <300>에 정치적 의미 외에 남는 것이 있다면 컴퓨터 게임 비주얼을 연상시키는 영상일 것이다. 몇 차례 나온 <씨네21>의 기사는 <300>의 아름다운 이미지와 하드보일드 스타일에 주목한 것이었다. 다 일리가 있는 얘기지만 영화의 정치적 의미를 살피지 않았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300>을 보며 타자에 대한 적대감과 전투적 애국심을 고취시킬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많지 않다고 믿지만, 워낙 세월이 하수상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