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바보 같은 사랑
2007-04-06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우아한 세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이번주에 <우아한 세계>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봤다. 스타일이나 소재가 전혀 다른 영화지만 두 작품엔 공통점이 있다. 웃고 즐기며 보다가 예기치 못한 대목에서 눈물이 흐른다는 점, 그리고 곱씹어보면 겉보기와 달리 심각한 비극이라는 점. 먼저 <우아한 세계>에서 송강호가 연기하는 주인공 인구를 보자. 조폭 중간보스인 그의 꿈은 멋진 전원주택에서 아내와 딸을 데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는 이번 건만 잘 처리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손에 피를 묻히고 밤잠을 설치며 등이 칼에 찔릴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한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보여준 근사한 고급 주택에서 인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집에 담고 싶은 모든 가치 힐스테이트? 모두가 꿈꾸는 그곳 자이? 숱한 아파트 CF가 유도한 대로 어떤 착각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좋은 집에 행복이 있다는 인구의 오해는 이중적인 방식으로 그를 불행으로 내몬다. 열심히 일할수록 조직도 그를 경계하고 아내와 딸도 멀어진다. 그렇다고 일을 그만둘 수도 없다. 유학간 아들의 학비를 대자면 조직일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40대 가장 인구는 그렇게 진퇴양난에 빠진 사내다. 꼭 조폭 중간보스라서 그런 건 아니다. 영화를 보면서 피곤에 찌든 보통의 직장인 아버지를 떠올릴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우아한 세계>는 한국사회에서 남자의 불행이 비롯되는 과정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마츠코는 어떤가. 그녀가 원한 것은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할 때 “어서 와”라고 답해주는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이다. 그녀가 원한 것은 늘 근엄한 표정만 보이던 아버지가 자신을 보며 미소짓는 것이다. 그녀가 원한 것은 자신을 때리고 욕하더라도 꼭 안아줄 수 있는 남자다. 아주 소박한 소망이지만 운명의 신은 마츠코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리!” 어째서 그런가? 자신이 훔치지 않은 돈을 훔쳤다고 말할 때부터 드러나듯 마츠코에겐 도무지 오염된 사회에 대항할 힘이 없다. 그녀는 거듭 남성의 이기적 욕망을 사랑으로 오해하고 제 몸과 마음을 한없이 퍼준다. 그러다 얼굴에 멍이 들고 가슴에 피눈물이 흐르는데도 예수의 가르침처럼 왼뺨도 때리라며 내민다. 인구가 사회적 통념과 조직문화에 너무 닳고 닳아서 문제라면 마츠코는 정반대로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을 만큼 너무 맑고 순수한 게 문제다. 예를 들어 <우아한 세계>에는 인구가 딸을 잘 봐달라며 담임선생님에게 봉투를 내미는 장면이 있다. 봉투에 든 룸살롱 상품권은 인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대변한다. 집=행복, 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내에게 선생=촌지 또는 남자=룸살롱, 이라는 공식은 자연스럽다. 자본주의 사회가 가르치는 대로 물질로 모든 것을 대체하는 것이다. 인구와 정반대로 마츠코는 감정에 모든 것을 내맡긴다. 그녀는 근사한 집 같은 물질적인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돈을 갈취하는 폭력남편이건 야쿠자건 옆에 있어만 주면 좋다고 생각한다. 너무 착해 화가 날 정도지만 영화의 밝고 경쾌한 리듬은 그녀에게 성자의 후광을 선사한다. 천성이 그래서 불행이 따라다니는 팔자인 걸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지겠나. 영화는 남성 중심 사회의 혐오스런 죄악에 대한 고발일 수도 있지만 결코 협박하거나 노여움을 표하지 않는다. 그저 마츠코를 보기만 하면 알아서 옷깃을 여미고 고해성사를 하게 만든다.

어떻게 보면 <우아한 세계>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둘 다 바보 같은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어리석다고 그들을 비웃노라면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우리는 바보처럼 안 살 자신이 있는가? 두 영화 속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듯 나의 어떤 모습을 보게 될 때 당신도 달리 어찌 살아야 좋은 건가 싶어 한숨이 나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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