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그의 웃음은 패배에서 싹튼다
2007-04-12
글 : 변성찬 (영화평론가)
선생 2부작에 이어 <이장과 군수> 내놓은 장규성 영화의 현재

<이장과 군수>는 장규성 감독의 네 번째 영화다. 데뷔작이자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영화 패러디였던 <재밌는 영화>(2002), ‘선생 2부작’이라 할 수 있는 <선생 김봉두>(2003)와 <여선생 vs 여제자>(2004). 모두가 코미디영화였고, <이장과 군수> 역시 코미디이다. 코미디가 한국영화의 주류 장르 중 하나로 자리잡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장규성이 그 흐름을 ‘타고’ 있는 감독 중 하나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가 그 흐름 안에서 자신만의 물살을 ‘만들어’내고 있는 감독 중 하나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이장과 군수>는 ‘선생 2부작’을 통해 드러난 그만의 독특한 ‘휴먼코미디’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어떤 변화의 모색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그 ‘같음’과 ‘다름’을 아우르며 장규성의 영화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하는 시점이 된 듯하다.

현실을 반영하는 유쾌하고 편안한 화법

‘착한 영화’ 그리고 ‘웃음과 감동이 공존하는 휴먼드라마’, 이것들은 장규성 코미디의 브랜드 이미지이자 수사이다. 분명 그의 영화는 ‘착한’ 영화이고, 그의 영화에는 ‘웃음과 감동이 공존’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말들은 그만이 지니고 있는 색깔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지 않다. 자칫 그것은 공허한 홍보 문구가 되거나, 기껏해야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는 비평적 수사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대부분의 코미디영화들이 ‘착한 영화’이고(심지어 ‘조폭영화’조차) ‘웃음과 감동이 공존’하는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전반부에서 갈등과 대결 구도를 통해 웃기고 후반부에는 갈등의 해소와 화해를 통해 감동을 준다는 설정은, 대부분의 한국 코미디영화들이 충실히 따르고 있는(최소한 따르고자 애쓰는) 흥행공식이자 대중영화가 의지하고 있는 공통의 서사전략이다.

장규성의 영화들은 이러한 흥행공식과 서사전략을 충실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따르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가 굳이 ‘착한 영화’라고 불리는 데에는 다른 이유들이 있다. 첫째로 그가 선택한 영화적 소재를 들 수 있다. 그의 영화에는, ‘폭력’과 ‘성’(性)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장규성의 코미디는 한국 코미디영화의 대표적인 두 하위 장르라 할 수 있는 ‘조폭코미디’나 ‘섹스코미디’가 아니다. ‘사랑 싸움’을 소재로 하고 있는 <여선생 vs 여제자>도 전형적인 ‘로맨틱코미디’와는 거리가 멀다. 이 당연한 사실의 확인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장규성 영화 세계의 출발점이 ‘영화 또는 장르’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점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말처럼 ‘한국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가 장규성 영화의 출발점이다. 한국영화 ‘패러디’로 자신의 영화 경력을 시작했음에도, 그의 이후 영화들에는 영화나 장르에 대한 매혹 또는 자기 반영적인 스타일의 과시나 실험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동년배 영화광 영화감독들과 그를 구별하는 특징이면서, 다시 한번 그의 영화가 ‘착한 영화’라고 불리게 되는 요인이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에서 출발해서, ‘한명의 관객이라도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유쾌하고 편안한 화법으로 코미디영화를 선택하고 만든다(이런 의미에서 그를 ‘충무로 리얼리즘’ 계보에 속하는 감독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장규성 영화의 독특한 색깔은, ‘웃음과 감동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웃음에서 감동으로의 전환의 자연스러움 또는 그 미묘함에 있다. 그 미묘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는, <선생 김봉두>에서 선생 봉두와 제자 소석이 함께 ‘물수제비’를 만드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봉두가 ‘여전히’ 자신의 계획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미’ 포기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것은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전학의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부추김(또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면서, 소석의 첫 번째 물수제비(낯선 선생님에 대한 수줍은 마음의 표시)에 대한 뒤늦은 그러나 진심어린 응답이기도 하다. 봉두는 서울의 레저 사업자에게 거액의 ‘봉투’를 받은 뒤, 그 돈으로 제자들 각각을 위한 선물을 사주는데, 그것은 자신의 계획을 위한 투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미 흔들리고 있는 그의 마음의 징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소소하고 미묘한 서사적 배치들의 누적이, 나중에 올 결정적인 ‘전환’을 자연스럽게 만들어간다. 장규성은 웃음에서 감동으로의 극적 ‘반전’을 이루어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친절하면서도 세밀한 서사적 배치를 통해 웃음과 감동을 ‘공존’시키려고 노력한다. 봉두의 촌지 밝히기가 그의 아버지 병원비 때문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제시된다.

웃음과 감동의 공존 또는 동시성, 이것은 인간은 누구나 완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그의 넉넉한 인간관을 드러내고 있는 듯 보인다. 병에 걸린 늙은 아버지를 끝까지 돌보고자 애쓰는 김봉두와 촌지만 밝히는 불량교사 김봉두는 다른 인간이 아니다. 첫 수업에 대한 설렘 속에서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외우고 있는 여미옥과 남몰래 서울 진출을 위해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여미옥은 다른 인간이 아니다. 여미옥은, 애들에게 “니들이 애들이니!”라고 야단치고, “너 학원도 안 다니니?”라고 물어보는 일상에서 히스테릭한 노처녀 여선생이 되어가고 있다. 장규성 영화에는 ‘웃음과 감동의 공존’만이 아니라 ‘감동과 웃음의 공존’이 있다. <여선생 vs 여제자>에서, 여미옥이 학교를 그만둔 뒤 다른 반 아이들이 ‘담임도 없는 주제’라고 반 아이들을 놀릴 때, 가장 분노하는 것은 고미남이다. ‘아비없는’ 고미남의 상처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여미옥 역시 아버지없이 자란 아픔이 있음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는 이후에 펼쳐지는 아이들(특히 고미남)과 여미옥의 연대와 화해에 강한 정서적 공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스승의 노래>를 <어머니 마음>과 구별하지 못할 때, 그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바로잡아 주는 것 역시 고미남이다. 이럴 때 장규성은 개과천선이라기보다는 그것의 현실적인 불가능성을, 화해라기보다는 그것의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선생 김봉두와 여미옥의 근본적인 개과천선은 불가능하다. 김봉두가 레저 사업자에게서 받은 돈을 되돌려주고 폐교 반대를 위해 나서는 것도 아니며, 여미옥이 ‘새로운 남자(또는 지위)’를 얻으려는 욕망을 버린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의 넉넉한 인간관은 아주 현실적인 인간관이기도 하다.

장규성식 정치적 저항의 방식

역설적이게도, 장규성 영화의 훈훈한 온기는, 현실에 대한 낭만적인 낙관에서라기보다는 매우 현실적인 비관에서 비롯되고 있다. 장규성의 영화 바탕에는 현실 또는 현실의 변화가능성에 대한 뿌리 깊은 비관이 자리잡고 있다. 장규성의 영화는, 외면상의 ‘해피엔딩’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영화라기보다는 패배의 영화에 가깝다. <선생 김봉두>가 불량교사 김봉두의 외견상의 개과천선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의 정치적인 ‘패배’를 보여주는 영화이듯이, <이장과 군수> 역시 우정 회복의 영화이면서 정치적인 ‘패배’의 영화이다. 마음의 고향이자 제2의 탄생을 위한 자궁인 산골 분교의 ‘폐교’는 막을 수 없는 현실이고, 우정의 회복은 정치적 패배를 그 대가로 치를 때 가능해진다. 도시화는 막을 수 없는 흐름이고, 변화를 가로막는 강고한 기득권의 힘은 쉽게 넘어설 수 없다. 그는 영화라는 허구적 장치를 통해서나마 쉽게 승리를 ‘상상’해보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이 현실적 패배를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그 패배를 강요하는 현실을 냉정하게 응시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냉정한 응시는 웃음과 감동이라는 틀 안에 왜상적(歪像的) 형상처럼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선생 김봉두>에서 드러났던 산골 사람들과 산골 분교 아이들의 그 믿을 수 없을 만큼 과도한 ‘순박성’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선생 김봉두>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낭만적이고 퇴행적인 ‘산골 오리엔탈리즘’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고, 그래서 불편했다. 하지만 그 이후 드러낸 그의 영화 세계 안에서 영화를 다시 되돌아보면서, 그 ‘과도함’이 어쩌면 그만의 정치적 저항의 방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도한 복종은 그 ‘과도함’ 때문에 저항의 몸짓이 되기도 한다(메저키즘적인 저항 전략). 사실 산골 아이들은 봉두의 진의를 끝까지 오해함으로써 그리고 과도하게(떠든 사람 이름을 적으라는 봉두의 명령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반장 아이) 복종함으로써 봉두를 무력화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모습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논평하는 소사 춘식(성지루)이 있다(“니들 변했다야… 사람이 그러면 안 돼”). <선생 김봉두>에서 소사 춘식은 다소 징후적이고 문제적인 인물이다. 그는 봉두를 처음으로 맞이하는(처음부터 대결하는) 인물이자 김봉두가 ‘金封套’임을 감지하는 인물이지만, 그와 정면 대결을 펼치는 것도 그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채로, 그 서사 공간을 배회한다. 소사 춘식의 시선과 위치는 현실과 영화를 바라보는 감독 장규성의 그것이자 이 영화의 숨어 있는 왜상처럼 보인다. 장규성의 영화 속 인물들은 대개 상대의 시선을 마주한 채로는 진심을 말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그들은 반드시 뒤늦게 도착하게 되어 있는 ‘편지’를 통해서만 진심을 이야기한다. 장규성 감독의 영화는 그 ‘편지’를 많이 닮았다.

한국영화에 대한 본격 패러디로 영화를 시작한 그가, <이장과 군수>를 통해 한국 정치 현실을 본격 패러디하고 있다. ‘판’이 너무 커진 탓인지 앞선 영화들에서 보여주었던 웃음과 감동의 밀도가 많이 묽어진 느낌이다. 앞으로 그의 영화 세계가 넓어진 폭만큼이나 깊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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