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시간으로 위장한 한 남자의 면죄부
2007-04-13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강간과 스토킹에 대한 남성중심적 시각 드러낸 <뷰티풀 선데이>

*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볼 생각이 있으나 아직 보지 않은 독자는 읽고나서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점을 미리 밝힙니다.

영화의 구조는 독특하다. 두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한두개의 이야기가 평행하게 나가다가 하나로 만나는 구조인데, 두 인물의 관계가 반전의 핵심이다. 이 영화를 범죄스릴러로 본다면 자신의 행위를 무의식적으로 망각한 이들에 관한 영화, <쓰리> <아카시아> <거미숲> <시크릿 윈도우> <숨바꼭질> 등과 비슷한 유형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범죄스릴러가 아니다. 누가 강 형사의 아내를 찔렀는지가 영화의 핵심이 아니며, 마약 거래나 만석동 강간사건들도 두개의 이야기를 동일 시간대의 사건인 양 위장하는 효과를 지닐 뿐 곁가지에 불과하다. 영화의 핵심은 강 형사와 그의 아내의 수년에 걸친 애증관계로 굳이 말하자면 멜로이다. 영화는 수년의 간극이 있는 사건을 평행하게 진행시키면서, ‘같은 시간대 다른 인물’의 이야기인 양 위장하다가 ‘다른 시간대 같은 인물’이었음을 드러낸다. 왜 이런 구조가 필요했을까?

미래를 가져와 현재를 정당화하는 구조

<뷰티풀 선데이>는 <사랑니>의 완벽한 역상이다. <사랑니>에서 학원강사 조인영(김정은)은 첫사랑의 남자와 이름과 용모가 같은 남학생 이석을 보고 사랑을 느낀다. 이어 여고생 조인영(정유미)과 이석의 연애장면이 나온다. 관객은 당연히 정유미 장면이 김정은의 과거장면이라 이해한다. 즉 ‘다른 시간대의 같은 인물’로 파악한다. 그러나 정유미가 김정은을 찾아오는 순간, 둘은 ‘같은 시간대의 다른 인물’임을 알게 된다. <사랑니>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30살의 여자가 17살 소년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것이 첫사랑에 대한 애틋한 감정 때문이라면 이해해줄 수 있겠지?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30살 여자가 17살 소년에게 품은 욕망이 첫사랑의 기억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면, 추악한 음욕이 되는가? 순수한 사랑과 추악한 음욕의 판단 기준은 과거 사연을 알고 모르는 차이에 있는가? 만약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이병헌의 사연을 모르는 상태라면 그가 남학생에게 품는 감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애틋하다고 할 것인가, 역겹다고 할 것인가? 그런데 누가 누구의 과거지사를 아는가? 나의 사연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지 않은가? 나는 나를 알기 때문에, 내 욕망에 면죄부를 발행할 수 있지만, 과연 타자의 경우에도 용서가 가능할까?

<사랑니>가 동일인물인 줄 알고 아름답게 보던 관객에게, ‘동일인물 아니어도 아름답니?’ 묻는 반면, <뷰티풀 선데이>는 다른 인물인 줄 알고 냉정하게 보던 관객에게, ‘동일인물인데 용서 좀 해주지?’ 하는 방식을 취한다. 즉 <사랑니>가 과거를 빌미로 현재의 욕망을 미화하는 것으로부터 절연하는 방식이라면, <뷰티풀 선데이>는 미래를 가져와서 현재를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그는 말한다. “평생 속죄하며 살게….” 영화는 이미 충분히 망가진 채로 의식불명의 아내 곁을 지키는 박용우(남궁민의 미래)를 먼저 보여주면서, 그는 미래에 내내 속죄할 테니, 용서해주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속죄와 용서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아내는 현재의 자상한 남편과 과거의 강간범이 동일인물임을 알았을 때, 그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는 자상한 남편 노릇이 강간죄에 대한 속죄가 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아내는 강간범이었던 남편의 존재를 견디지 못한다. 또한 그는 수년째 간병하는 행위를 통해 아내를 상해한 죄를 속죄하고 있다(아내가 의식이 있다면 그것을 견딜 수 있었을까?). 그런데 그것이 과연 올바른 의미의 속죄인지 따져물을 필요가 있다. 속죄는 우선 죄의 사실을 적시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은 왜 일본의 사죄없는 보상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가?). 우선 강간의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속죄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강간을 사랑으로 치환한다(“널 정말 사랑했어”). 우발이든 사고이든 칼로 찌른 자신의 행위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강도사건으로 위장한다.

강간을 사랑으로, 살인을 강도사건으로 전치(그의 말버릇 “차가 와서 비가 많이 막히네요”)시킴으로써 그는 죄와 분리된다. 자신을 죄로부터 분리하여 “죄지은 착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그는 이미 자신을 용서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그의 속죄는 무의미하다. 그가 속죄의 이름으로 행하는 후속조치들은 또 다른 집착의 변주들일 뿐이다. 즉 강간하고 일부러 접근하여 결혼한 행위나 찔러놓고 간병하는 일련의 행위에서 ‘전자를 죄(폭력)-후자를 속죄(순정)’로, 즉 상반된 의미로 볼 수 없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점에서 상반되기는커녕 동일하다.

가해자 관점의 서술방식의 한계

상반된 듯 보이는 ‘폭력’과 ‘순정’이 앞뒷면으로 결합된 지점에 이 영화의 최초의 사건, 강간죄가 놓여 있다. 짝사랑하던 여자를 강간한 것과 모르는 여자에게 성욕을 풀기 위해 강간한 것은 다르지 않느냐는 질문을 이 영화는 깔고 있다. 물론 남자(가해자)의 입장에선 다르고, 여자(피해자)의 입장에선 같다. 즉 사랑해서 강간했다는 말은 남자의 입장이지, 여자의 입장에선 똑같은 폭력일 뿐이다. 또 사랑-강간-결혼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관점, 즉 ‘사랑해서 강간했고, 결혼해서 책임졌다’는 관점 역시 남자의 관점이다. 이는 강간을 성행위의 일종(적극적인 구애의 과정이자 조금 거친 성행위)으로 파악하는 것이요, ‘정조에 관한 죄’로 보는 관점이다. 강간 이후 계속 그녀를 사랑함(훼손된 정조를 책임짐)으로써 사태가 마무리됐다고 보는 것이다.

1994년 이후 형법상 강간은 ‘정조’가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에 관한 죄로 바뀌었지만, ‘정조’의 개념이 완전히 일소된 것은 아니다. ‘부부간 강간’이 성립되지 않고, 피해자를 여자로 한정하는 것, 남성의 성기 삽입 유무가 강간과 강제추행의 구분점이 되는 등이 그 예이다. 또한 강간의 구성요건으로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성행위’ 여부가 아니라, ‘피해자의 반항이 현저하게 곤란한 정도의 폭행과 협박’을 두어, 피해자의 거부의사보다 가해자의 폭행과 협박, 피해자의 적극적 항거를 중요시하는 등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중심으로 한 강간의 개념이 아직 불완전하다. <뷰티풀 선데이>는 강간에 관한 남성 중심적 관점에 반쯤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 (박용우의 대사 “결혼까지 했으면 해피엔드 아닌가?”), 한편으로 피해자의 관점을 일부 수용한다.

<뷰티풀 선데이>가 남자주인공의 시각을 통해 사건을 재현함으로써 남성 중심적 입장을 드러내는 측면은 다음과 같다. 첫째, 스토킹을 순정으로 미화한다. 시계를 맞춰놓고 그녀가 지나가는 것을 보는 정도는 귀엽지만, 데이트하는 그녀를 따라다니며 훔쳐본다든지 모텔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그녀 뒤를 밟는 행위들은 짝사랑이 아니라 스토킹이다. 둘째, 강간의 정황을 그의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요컨대 매일 지켜보던 그녀가 다른 남자와 모텔에서 나오는 것을 본 그가 수줍게 말을 걸다가, 그녀가 오해하여 소리치자 우발적으로 강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텔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와 ‘우발적 충동으로’이다. 영화는 짝사랑하는 남자의 시선으로 그녀의 ‘음행’을 잡으면서, 그가 그녀에게 성적 충동을 느낀 심정이 이해되지 않느냐고 설득의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다. 또한 그가 말을 걸던 장소는 고시촌이고 강간이 일어난 곳은 뒷산으로, 그는 그녀를 비오는 밤 뒷산까지 끌고 간 것이다. 우발적 충동이라 하기엔 과정이 복잡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 과정을 축약하고, 이내 책상 앞에서 괴로워하는 그와 다시 수줍게 그녀에게 접근하는 그로 점핑해버린다. 여기서 그녀의 피해는 묘사되지 않는다. 그녀는 다시금 아름답게 정돈되어 있다. 그의 강간의 범죄성을 최소한 축소하고 표백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살인이 일어나는 과정도 칼을 빼앗으려다가 사고가 났고, 우발적으로 다른 사람까지 찌르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위장하게 되었다고 묘사하지만, 그는 이미 형사의 신분이었다. 아내가 칼에 찔린 뒤 얼마든지 합리적인 수습이 가능했으며, 아내를 병원으로 후송하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김현식까지 동원하여 강도사건으로 위장하는 동안 출혈이 심한 아내는 계속 현장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 뻔한 정황까지 영화는 그의 자기변명에 의존하여 눈가림한다. 넷째, 그가 의식불명 상태의 아내를 간병하는 것을 중요하게 보여주면서 면죄의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그것 또한 아내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온전히 그녀를 소유하려는 욕망의 다른 판본임에도 카메라는 그를 그저 가엽게 잡는다. 영화의 말미, 심지어 그가 죽자 아내가 깨어나는 것이 암시된다. 이는 마치 그의 죽음을 통한 속죄가 마침내 그녀를 소생시켰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 영화의 표제이기도 한 ‘사랑이 용서받는 날’이란, 그의 이전 행위는 모두 ‘사랑’이었고, 그의 죽음은 ‘용서’를 얻었다는 파렴치한 의미를 내포한다.

<뷰티풀 선데이>가 그나마 미덕이 있다면 강간에 대한 피해자의 관점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가 강간 이후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는 한두줄의 대사로 지나가지만, 자신을 강간한 남자와의 결혼생활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녀의 몸부림은 녹록지 않게 담겨 있다. 그녀는 그와의 달콤한 연애와 결혼생활도 폭력이 탈각된 순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독한 폭력의 연장선(“다시 날 찾은 이유가 뭐야? 나한테 왜 이러는데? 어쩜 이렇게 지독하니?”)으로 이해한다. 그녀의 분노발작은 강간을 ‘정조’에 관한 죄로 이해하는 관점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으며, 피해 여성의 관점에서 그녀의 내면적 고통을 이해해야만 납득이 가능하다. <뷰티풀 선데이>는 한 남자의 과거와 현재를 충돌시키며 ‘자기-면죄부’ 발행의 논리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또한 강간에 대한 남성 중심적 통념들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일부나마 여성 피해자의 관점이 포함되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강간에 관한 최악의 영화로 손꼽힐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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