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잘나갈 땐 이런 포즈도 하고 그랬는데….” 손을 허리에 도도히 얹고 다리를 쭈욱 뻗는 자세를 한번 취해보더니 박지영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며 도리도리다. “척 안 해도 여자인 것을. 나 여자입네 하는 것도 웃기잖아요.” 사진기자가 여성스러운 포즈를 한번 취해달랬더니, 그것도 싫단다. 대신 ‘썩소’ 표정을 지으며 장난이다. “어색한 걸 못 견디는 체질이에요. 그래서 매번 장난으로 마무리를 해요.” 말은 않지만 입고 온 청재킷으로 어서 빨리 갈아입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원래 낯가림이 심해요. 폐쇄적이고. 젊었을 때는 일부러 밝고 명랑하게 지내려고 날뛰고 그랬는데. (웃음) 사실 전엔 남들이 나보고 성격이 쾌활하다고 해서 그런 줄 알기도 했어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1∼2년 정도 혼자 있는 시간을 갖다보니 제 자신을 좀더 들여다볼 수 있게 됐어요.” 미용실 ‘아줌마’에게 등 떠밀려 미스 춘향으로 뽑힌 뒤 탤런트 생활을 한 지도 18년. <장녹수> <꼭지> 등에 출연하며 유명세를 맛봤던 그는 몇년 전에서야 ‘긴 쉼표’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전엔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것을 얻었어요. 그러다가 최선을 다해도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없던 시절이 오던데요.” 무력감을 느꼈던 2년 전, 그는 남편을 따라 베트남 호치민으로 거처를 아예 옮겼다. 남국에 가닿아서야 그는 “아무것도 안 하는” 몰랐던 삶의 재미를 조금씩 알아갔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9시에 잠들어요. 애들 학교 보내고 나서 책 읽고 수영하고. TV는 1년 동안 쳐다보지도 않았고. 생각하기에 따라선 여왕 같은 삶일 수도 있고 지루한 삶일 수도 있는데…. 그러면서 저를 돌아보게 됐는데. 말로는 욕심이 없다면서 속으론 더 많은 걸 원하고 있었구나 싶었어요.”
버리면 얻는 게 세상 이치. 상실을 치유하려고 끊임없이 자신을 “가라앉히는” 동안 그가 18년 동안 짝사랑하던 상대가 제발로 찾아왔다. “90년대만 하더라도 출연 제의가 있었는데 결혼하고 나서 소식이 끊어졌어요. 혼자서는 좋은 영화 해야지, 좋은 역할 해야지, 좋은 배우들이랑 해야지 그랬는데….” <우아한 세계>의 미령 역을 제의받았을 때 그는 매니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게 어떤 작품이지?” 최대한 도도하게 말한 뒤 그는 침대에서 좋아라 데굴데굴 굴렀단다. “내가 억세고 드센 여자만 했다고 하는데. 사실 드라마는 캐릭터와 배우를 구별해서 보지 않아요. 장녹수를 맡으면 목욕탕 가서 등짝 맞아야 하고. 반면 영화는 달라요. 왜 오달수는 좋은 역할 한번도 안 했지만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오잖아요. 영화는 나도 몰랐던 나를 보여주지 않을까. 그게 오랫동안 기다린 이유죠.”
하지만 조폭 생활을 청산하지 않으면 이혼하자고 으름장을 놓는 <우아한 세계>의 미령이 되기까진 떼내야 할 꼬리뼈도 많았다. “대사를 달달 외워갔는데 현장에서 다 바꾸는 거예요. 한번은 촬영 중에 (송)강호 오빠에게 ‘대사 안 하실 거예요?’ 그랬다니까요. 드라마에서는 써준 대본대로 안 하면 큰일나는데. (웃음) 나중엔 감독님이 아예 저에게는 대본을 안 줬어요. 미리 준비하면 아무래도 전형적인 연기가 나오니까.” 드라마였으면 “울리고 지르면서 물고늘어졌을 테지만” 감정신에서 “탁 쳐내버리고 툭 하고 넘어가는 영화”라 처음엔 적잖이 당황도 했다. “제가 끝까지 갖고 있어야 할 설정은 딱 하나뿐이었어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의 메릴 스트립처럼 미령도 남편을 한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거. 그래야 그 남자의 이야기가 더 돋보일 테니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 하나. 박지영은 소문난 영화광이다. “영화광은 좀 그렇고. 남편 만나서 책이랑 영화랑 좀더 가까워진 편인데. 제 성격처럼 영화도 새것보다는 묵은 걸 좋아해요. 영화도 이것 저것 찾아본다기보다 맘에 드는 걸 계속 돌려보는 편이고.” <타인의 삶>을 보면서 “왜 우리는 아줌마 배우를 안 쓰는 거야”라고 흥분하고, “정서 고양이 필요할 땐” <브로크백 마운틴>을 꺼내든다는 그는 <우아한 세계>의 미령이 “앞으로의 18년을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제가 원래 처음에는 잘 못하는 편이에요. 천천히 적응하다가 한번에 탄력받는 용수철 스타일이거든요. 지금은 조금씩 걷지만 언젠가 어느 지점에 가 있을 거예요. 삶은 어차피 진행형이잖아요. 영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