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매케이브와 제임스 매케이 같은 인물의 도움에 힘입어, 데릭 저먼은 영국영화연구소(BFI)로부터 세편의 영화에 대한 제작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저먼 영화의 시기별 대표작으로 위치한 <천사의 대화> <카라바지오> <비트겐슈타인>이 그 이름들이다.
1970년대 후반, 장편영화에 의욕적으로 임했던 저먼은 1980년대 중반까진 실험적인 단편 작업에 몰두했는데, <천사의 대화>는 그 시기와 두 번째 장편영화 전성기를 연결하는 영화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주디 덴치의 내레이션, 코일과 벤자민 브리튼의 음악에서 나오는 부조화의 조화와 슈퍼 8mm로 찍은 원본을 초당 3프레임의 속도로 재촬영해 회화와 사진의 느린 동작처럼 만든 영상은 <천사의 대화>를 가장 아름다운 저먼 영화로 만든다. 죽어가는 화가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에게 떠오르는 과거의 사람, 사건, 기억들을 플래시백으로 그려낸 <카라바지오>는 예술과 돈, 권력과의 관계를 다룬 작품이다. 색채 사용이 아찔할 정도로 매력적이라고 평가받았으며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상대적으로 지나친 내러티브 스타일과 통제된 작업방식에 대해 저먼이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만약 <블루>를 하나의 회화로 헤아린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영화로서 저먼의 유작에 해당한다. 몇몇 번역서로 국내에도 알려진 좌파 이론가 타리크 알리가 <채널4>의 교육 프로그램으로 기획한 ‘철학자 시리즈’의 한편이었던 <비트겐슈타인>은 BFI의 지원이 더해지면서 상영시간과 형식의 변화를 가져와 극영화로 바뀌었다. 흑색 배경과 간단한 소도구 그리고 한정된 인물이란 미니멀한 형식으로 20세기의 혁명적인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유년기부터 죽음까지를 재구성한 작품인데, 당시 에이즈로 인해 색구분이 힘들었던 저먼은 그것을 앙갚음하듯 <비트겐슈타인>을 현란한 원색으로 칠해놓았다.
저먼은 “내 영화는 본질적으로 나에 관한 것이다. <블루> 이전의 모든 작품 속에서 은밀한 방식으로 나를 위장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세 영화를 연결하는 주제는 다름 아닌 ‘중심부로부터 소외되고 성적으로 억압받았던 존재의 이야기, 게이 로맨스의 긴장 혹은 꿈’일 것이다. BFI가 출시한 세편의 DVD는 감독, 배우, 제작진 인터뷰 외에 촬영감독의 음성해설(<카라바지오>), 저먼의 말기 모습을 볼 수 있는 단편영화 <숲>, 메이킹 필름과 이언 크리스티의 작품 소개(<비트겐슈타인>) 그리고 작품 및 감독 비평과 화보로 구성된 책자 등의 알찬 부록을 수록해 저먼의 죽음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