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물차가 드나드는 철도변은 먼지가 많았고 초겨울처럼 쌀쌀했다. 황사까지 몰려와 스산한 날씨였지만 박해일은 오히려 이런 날이 마음 편하다고 했다. “햇빛이 따갑게 비치는 날보다 도시에 약간 회색빛이 도는 오늘 같은 날 마음이 편하다.” 햇빛 찬란한 청춘보다는 그늘지고 먼지 묻은 느낌이 더욱 어울렸던 배우다운 말이었다. 그리고 4월12일에 개봉하는 그의 영화 <극락도 살인사건>도 파랗게 빛나는 남쪽바다가 아닌, 해신(海神)의 변덕으로 인해 고립된 폭풍의 섬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안개와 바람이 섬을 감싸면 이세상으로부터 홀로 떨어진 듯하여 극락도라고 불리는 외딴섬. 그곳에서 마을주민 열일곱명이 사라지고, 남은 흔적이라고는 쪽지 한장과 머리만 남아 떠내려온 시체 한구뿐이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뭍에서 건너온 형사들의 발길을 따라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선한 얼굴로 웃고 있는 보건소장 제우성과 마을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세상이 아름답다!”고 노트에 적었던 착하고 성실한 의사 제우성은 섬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사건을 맞아 냉기와 의심을 품고, 그것은 다시 폭력과 광기로 흘러가고 만다. 한때 극락도였으나 며칠 만에 지옥도로 변해버린 남해의 섬에서 건너온 박해일과 먼저 기찻길의 추억을 나누며 대화를 시작했다.
-기차 여행을 좋아하는지.
=평택과 천안 사이에 있는 남서울대학교를 다녔는데, 스쿨버스가 있었는데도 가끔 용산역으로 가서 기차를 탔다. 스포츠신문하고 캔맥주, 돈이 있으면 마른 오징어도 사서 통일호 객차 사이에 있는 통로로 갔다. 그때는 통로문을 열 수 있었다. 거기에 앉아 담배도 피우고 맥주도 마시면서 신문을 보다보면 어느새 학교였다. 그렇게 여행하듯 학교에 가는 느낌이 좋았다. 남들이 보면 대책없어 보였겠지만. (웃음)
-<극락도 살인사건>을 주로 찍었다는 가거도와 그곳으로 가는 뱃길도 마음에 들었는지. 배를 타고 들어가는 길만 네 시간이 넘는 곳이었다던데.
=나는 이상하게도 생리적인 현상에 적응이 빨라 배멀미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파도가 거친 날 몇번 배를 타다보니 노하우도 생겼다. 술을 마시면 신경도 무뎌지고 잠이 오니까 금방 섬에 도착하더라. 처음엔 헬기를 타고 들어가게 될 줄 알았는데, 제작사 대표가 노력은 해봤지만 섭외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 (웃음) 가거도는 기운이 센 섬이다. <인어공주>를 찍은 우도는 아름답고 평온한 느낌이었는데, 가거도는 거칠고 이국적이고 남성적이다. 풍경이 수려해서 처음 며칠 동안은 관광객처럼 신이 났지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안개가 끼면서 바람도 세지니까 고립감이 심해졌다. 남쪽 끝에 있으니까 서울까지 가려면 10, 11시간? 그런데도 최주봉 선생님은 교통방송에 출연을 하시더라. 흐트러짐도 없이. 대단한 관록과 체력에 놀랐다.
-명문대 출신 의사인 제우성은 사람 좋고 명석하고 비밀스러운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변화해가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는가.
=촬영을 시작할 무렵엔 명석한 캐릭터니 인간 박해일이 다른 모습을 추구해볼 수 있겠구나, 나름 달라보이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연기라고는 해도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느낌이 나올 수밖에 없더라. 그래서 명석함은 포기하고, 섬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도 낯선 표준어를 쓰는 이방인인 제우성의 느낌을 살리게 됐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느낌이란 어떤 것일까. <좋지 아니한가>의 정윤철 감독은 평소 당신을 관찰했던 느낌을 이상한 교사 경호에게 투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봉준호 감독도 <괴물>의 남일은 너란 사람과 가장 어울린다고 말했다. 그런 말들이 100% 맞다고도 못하겠고, 틀리다고도 못하겠다. 경호는 3차원도 아닌 것이 4차원 같기도 한 것이 이상한 느낌인데, 정윤철 감독과 비슷하기도 한데…. 하지만 <극락도 살인사건>은 캐릭터로 인해 드라마가 풍부해진다기보다 캐릭터가 드라마에 묻어가는 편이 좋은 영화였다. 굵은 드라마를 살려야 하는. 그러니까 땅속에 굵은 호스나 관이 묻혀 있고 그 안에 자잘한 배선이 들어 있는 영화라고 보면 될 거다. 제우성이 영화를 끌어간다기보다… 아, 이 말이 맞겠다. 범인은 우리 안에 있다. 영화에 나오는 대사인데 범인은 마을 주민들 가운데 누군가다. 영화 후반부에 개인기가 두드러지는 연기가 있기는 하지만 <극락도 살인사건>은 우리 안에 있는 범인을 추적하는 드라마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범인을 비롯한 극락도 주민들은 악의를 가진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잔혹한 살인은 계속되고 비극은 멈추지 않는다.
=<극락도 살인사건>에는 잔인할 수도 있을 살인이 몇번 나오지만 그걸 보여주는 데 집중하는 영화는 아닌 것 같다. 나는 피가 낭자하고 잔인한 공포보다는 사람의 잔혹한 기운에 의해 다가오는 공포가 더 무섭다고 생각한다. 사실 피가 흐르고 사람이 죽고 이런 건 영화보다 뉴스가 더 무섭게 다루지 않나. 그런 점에서는 영화는 뉴스를 따라잡지 못한다.
-<극락도 살인사건>은 스릴러와 코미디와 공포가 두루 섞여 있는 영화다. 코믹했다가 무서워진다기보다 코믹하면서도 무서운, 여러 느낌이 한 장면에서 뒤섞인다. 주연으로서 <극락도 살인사건>은 어떤 영화가 될 것 같은가.
=어떤 부분은 크게 심각하고 어떤 부분은 크게 우울하고, 그래서 희로애락의 폭이 주가등락 곡선처럼 오르내리는 영화는 아니다. 아직 완성된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후시녹음을 하거나 하며 보았던 느낌으로는 찌릿찌릿하는 전류가 계속 흐르는 영화일 것 같다. 한의원 가면 관절을 치료하는 데 쓰는 기구가 있지 않나. 그런 느낌 말이다.
-한의원에서 관절치료를 받을 일이 있었나보다.
=어릴 적에 오른쪽 발목을 자꾸 접질렸다. 몸이 허약하기도 했고 다른 생각에 빠져 그러기도 했고. 나는 살다보면 가장 기본적인 것들, 이를테면 하루 세끼 밥먹는 것 같은 기본적인 일상을, 자주 잊어버린다. 아, 정윤철 감독이 그런 걸 봤는지도 모르겠구나! 요즘은 술을 마시면 가끔 필름이 끊기는데 도어록 비밀번호를 4자리에서 10자리 가까운 숫자로 바꾸면서 내가 집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들어가는 거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창문을 닫고 옷을 갈아입고 옷걸이에 걸어두기까지 한다. 그런 날 일어나면 무서워진다. 기억에 없는 이런 행동을 했다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니까 <극락도 살인사건>처럼 범인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웃음)
-<극락도 살인사건>의 몇몇 인물은 과거의 악몽이나 슬픔과 대면하기도 한다. 당신에게도 대면하기 두려운 상황이 있는가.
=내가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없는 상황이나 타인과 소통되지 않는 상황. 그것은 단순히 불편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훨씬 큰 문제로 번질 수도 있다. 만약 촬영현장에서 감독과 배우가 소통을 하지 못한다면, 그런데 그것을 내버려둔다면, 서로 원하고 있던 것과 정반대인 영화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몇년 전 당신은 인터뷰를 어려워하고 인터뷰가 끝나면 안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달라 보인다.
=그때는 인터뷰를 하는 건 과연 뭘까 싶었다. 수단과 방법을 터득해서 적용을 해야 하는데, 자꾸 팔려다니기만 하니까, 주인정신을 잃어버리는 거다. (웃음) 지금은 편하다. 능수능란해졌다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고, 섬에 가서 이렇게 고생을 하며 이런 작품을 찍었다라고, 관객과 소통을 하고 싶다. 하지만 직접 대화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필터가 필요하다. 이런 지면 인터뷰나 동영상이 그런 필터다. 설사 영화가 나쁘더라도 나는 내가 찍은 영화를 책임지고 싶고 그 영화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