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감독은 특수효과가 잔뜩 들어간 군중장면을 조율하는 데서가 아니라 세부적인 부분을 다루는 기술에서 능력을 인정받는다. <오래된 정원>에는 단 하나의 찬란한 순간이 있다. 술에 약간 취한 여주인공이 연인에게 다가간다. 오징어 다리가 입 밖으로 삐죽 나와 있는 기발한 착상의 장면이다. 뱀의 혀 같은 이 물고기의 말단은 그녀에게 파충류 같은 느낌의 무서운 관능적 힘을 부여한다. 여기서 이 영화가 임상수 감독의 작품임을 살짝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오래된 정원>은 원작 소설과는 반대로 1960년대 일단의 프랑스 비평가가 ‘부실한 걸작’이라고 냉소적으로 이름 붙인 그 상태, 즉 부상 당한 운동선수처럼 땅에 붙박인 특성들로 가득 찬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인상적인 실패에 대한 해부라 할 수 있다.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은 여인에 관한 뛰어난 초상이며 동시에 역사적 벽화이기도 하다. 첫 번째 지지대가 무너지는 순간은 좋은 연기자임에도 염정아가 소설 속 인물의 밀도를 비워버린 순간이다. 시골에 살고 있는 그녀는 축축한 풀 내음과 나무 태운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초기 작품의 공리와 같은 땅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프라다를 입은 운동권 좌파처럼, 목탄이나 물감의 흔적으로 더럽혀진 모습이 없는 화가처럼, 그녀는 압구정역 스타벅스 안에서나 마주칠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그 순간부터 그녀의 연기자로서의 재능이 어떠하든 간에 인물은 더이상 존재할 수 없다. 나는 프랑스어 제목을 직설적으로 <한국 여인>으로 정해버릴 정도였던 <바람난 가족>과 마찬가지로 <처녀들의 저녁식사>도 주인공들이 작품을 자신들의 의지와 생명력으로 지배했음을 기억한다. 임상수 감독은 여배우에게 생생한 육체를 부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많은 나라에서처럼 한국의 스타들도 이제 장애물 앞에서 그들의 고삐를 끌어당기는 기생충 같은 매니저들에 둘러싸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매니저들은 연기자들의 가능성을 마비시킨다. 그들은 역할보다는 배우들의 이미지를 더 걱정한다. ‘이미지 보호’라는 생각은 변신에 기반한 배우라는 직업의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다. 좋은 배우는 고정된 이미지가 없다. 전문가는 문소리에게 <오아시스>를 거절하라고 진지한 충고를 했을 수도 있다. 프랑스에서도 이런 종류의 조언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카트린 드뇌브에게 <사브린느>를 피해가라고, 베아트리체 달에게 <베티블루 37°2>를 회피하라고, 줄리엣 비노쉬에게는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지저분한 모습을 너무 보이지 말라고.
<오래된 정원>은 잘 보호된 배우의 이미지가 작품의 주제를 향하는 통로를 부순 격이다. 대부분의 한국 관객은 이 시대의 폭압을 알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 관객이 영화를 볼 때, 옥중 생활과 고문을 겪고 20년만에 출소하는 지진희가 마치 온천욕을 하고 나오는 사람처럼 보이면, 한국의 독재정권을 어떻게 생각할까? 약간 마르고 매력있는 희끗희끗한 가발로 꾸며진 그의 모습은 소설 <오래된 정원>의 단식 투쟁에 대한 묘사를 읽은 사람에게는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즉 배고픔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항문에 소금물을 주사하거나, 사지가 푸르스름해지고 뼈를 깎는 듯한 추위 등에 대한 묘사를…. 역사의 어떤 페이지, 어떤 고통은 당연히 흰 치아를 드러내는 치약 광고의 미소와 건강체조교실 강사의 모습으로는 그려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