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2일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개봉한다. 100개의 작품이라는 말 자체도 기적처럼 느껴지지만 유독 부침 많았던 한국 현대사와 한국 영화판에서 40년 이상 살아남았다는 것은 임권택의 작가적 성공보다 더 기적적으로 보인다. 한국영화와 함께 살아남았고 성장했고 또 현재진행형으로 한국영화를 움직이고 있는 임권택의 영화적 역사를 당시의 충무로 풍경과 함께 들여다본다.
데뷔 전 - 먹고살기 위해 영화판에 뛰어들다
18살, 한국전쟁 통에 집을 나온 임권택은 ‘꿈 없는’ 가출 소년이었다. 일본 유학 중에 좌익이 되어 돌아온 삼촌으로 인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집안의 공기를 견디지 못한 가문의 장손이자 칠남매의 맏이는 기찻값만 달랑 들고 부산으로 떠났다. 노가다판을 전전하다 만난 군화장사꾼들은 전쟁이 끝나자 남은 군화를 그에게 맡기고 서울로 떠났다. 얼마 뒤 서울서 군화 장사 대신 돈 된다는 영화판에 뛰어든 사람들의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시작한 제작부의 허드렛일이 감독 임권택의 첫 발걸음이었다. 노가다를 할 때처럼 푼돈이 생기면 늘 술을 마셨다. 그에게 영화는 꿈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한 방편이었다.
1960년대 - 26살 데뷔, 미친 듯이 영화를 찍어내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위에서 영화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낙이었다. 순풍이 불기 시작한 영화판에서 임권택은 5년 남짓 한국 액션영화의 대부로 알려진 정창화 감독의 연출부를 했다. 이때 그는 감독 데뷔도 하기 전에 영화판을 떠날 뻔했다. 정 감독의 <비련의 섬> 촬영 때 주연배우 김삼화가 감독과 시비가 붙어 막무가내로 촬영을 거부하자 연출부 셋째였던 그가 분통을 참지 못해 배우를 한대 때린 것. 결국 김삼화에게 뺨 석대를 맞는 것으로 영화 중단의 위기를 넘겼지만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주연배우가 돌아가는 차 앞에 드러누울 정도로 젊은 혈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영화판에서 “똘똘하다”고 소문난 그가 감독 데뷔작인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찍은 1962년은 한국 최초의 영화법이 제정된 해이기도 했다. 71개에 달했던 영화사가 16개로 통폐합됐고 영화사 설립도 등록제로 바뀌었다. <오발탄>의 상영이 금지되는 등 군사정권의 검열은 강화됐지만 60년대는 유현목, 이만희, 신상옥, 김기영 등 실력있는 감독들이 활동하면서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일궈낸 시절이기도 했다.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만추>, 신상옥 감독의 <벙어리 삼룡> 등이 흥행했고, 한국 영화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두만강아 잘 있거라>가 흥행에 성공했음에도 이때까지 임권택에게 영화적 야심은 사치였다. 첫 영화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도 ‘망하고 나면 조연출로도 안 써줄 텐데’ 하는 걱정 때문에 망설일 정도로 ‘생계형’ 감독이었던 그는 10년 동안 제작자로부터 주어진 작품만 ‘주문생산’하는 데 급급했다. 60년대 말에는 한해에 무려 8편에 이르는 영화를 ‘가케모치’(겹치기)할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다. 데뷔 뒤 11년 동안 50편의 영화를 연출했으며 임권택은 스스로 그 시대의 자신을 “저질흥행감독”으로 기억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만다라>로 임권택을 발견한 일본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그의 평전을 쓰기 위해 한국영상자료원에 의뢰해 임 감독과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보러갔을 때 상영 시작 뒤 5분 만에 자리에서 나가버린 임 감독의 부끄러워하던 모습을 회고하기도 했다.
1970년대 - 새마을영화와 반공영화 사이에서 길을 찾다
70년대에 강화된 검열로 영화 만들기는 점점 더 힘들어졌다. 텔레비전의 대중적 보급도 한국영화를 죽이는 데 한몫 했다. 대부분의 영화사들은 60년대 후반 만들어진 ‘우수영화 보상제’에 ‘올인’했다. 우수영화 추천제는 정부의 ‘우수영화’ 추천을 받은 영화사에 외화수입권을 줬던 제도. 이렇게 한해 스무편 정도 수입됐던 외화는 그야말로 로또복권이었던 탓에 한국영화는 외화수입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고 ‘추천용’ 새마을영화와 반공영화가 범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이 ‘저질흥행감독’ 임권택의 도약을 뒷받침하게 됐다. 제작자들은 어차피 한국영화 흥행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임권택은 늘 그의 머릿속을 짓누르던 흥행압박에서 벗어나 감독으로서의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작가적 자의식이 녹아든 첫 영화로 꼽히는 <잡초>를 직접 제작했다가 망한 다음 <증언> 같은 대작 전쟁영화, <아내들의 행진> <왜 그랬던가> 같은 계몽영화를 만들었다. 10년 넘게 훈련된 연출력과 작가적인 비전을 자각하면서 그의 영화들은 서서히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러나 엄격한 테두리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의 한계는 명백했다. 임권택 작품에서 최초로 고향 또는 한국 땅 이야기를 시작한 것으로 평가받는 <아내들의 행진>의 마지막에는 영화의 맥과 무관하게 무장공비가 튀어나오는 장면이 들어가야 했고, <왜 그랬던가>는 원제 <알래스카의 늑대>에서 알래스카가 함경도를 연상시키며, 그러면 함경도로 넘어가자는 뜻인가라는 정부쪽의 말도 안 되는 추궁으로 <왜 그랬던가>로 바뀌게 된 것. 분단 소재의 영화 가운데 지금도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짝코>가 당시 우수반공영화로 꼽힌 건 평론가들에게도 농담거리가 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환경이었다.
70년 중반 극장가는 또 <별들의 고향>의 이장호, <바보들의 행진>의 하길종으로 대변되는 청년문화의 개화기였다. 그러나 흥행력도 떨어지고 청년문화에서도 소외된 임권택에게는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가 개봉관에서 사라지다시피하면서 우연히 만난 고향친구에게 “자네, 요즘도 영화하는가?”라는 인사를 받으며 “완전히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초조하게 이번 영화가 마지막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현장에 나가던 시절이었다.
1980년대 - 관객과 만나다, 세계와 만나다
<족보> <깃발없는 기수> <짝코> 등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훗날 재평가되는 영화들을 만들면서 임권택은 80년대로 건너온다. 그 첫 결실이 <만다라>였다. 김성동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만다라>는 한국영화 최초로 베를린영화제에 본선 진출했고, 이후 빨라지고 넓어진 한국영화의 세계 진출에 첫 테이프를 끊었다. 그런데 작가적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이 시기에도 임권택은 상투적인 장르영화를 간간이 만들었다. “(영화작가로) 자부심 같은 건 별로 없다”고 말한 그는 “영화가 직업인 사람이 직장에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프로 감독론’을 가지고 있었다.
70년대 말 호스티스영화에 이어 80년대 극장가는 본격적으로 ‘에로’영화가 활개를 쳤다. 80년대 최고 흥행작인 <애마부인> 시리즈는 당시 중학생들에게까지 동시상영관 필수관람영화로 꼽힐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변강쇠> <뽕> 등 토속 에로물 시리즈도 승승장구했다. 이 가운데 등장한 <씨받이>인지라 어쩌면 당연하게 ‘에로’시리즈로 분류가 됐고, 해외 영화제에서 찬사를 받은 것과는 달리 이 역시 동시상영관을 전전하는 신세에 머물렀다.
당시도 살벌했던 검열로 인해 처음 찍었던 필름을 대부분 버려야 했던 <티켓>처럼 찍고 나서 “(작품 훼손으로 인해) 오만정이 다 떨어지는” 작업도 여러 번 했지만 조계종의 거센 반대로 작품 자체가 엎어졌던 <비구니>는 그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다. “비구니를 벗겨서 장사한다”는 외설시비로 엎어진 이 영화는 “내가 찍었던 전투장면 가운데 가장 훌륭했다”는 대규모 군중신을 비롯해 1만2천자가량 찍어놓은 상태였지만 지금은 필름조차 사라진 상태. <씨받이> <비구니> 모두 어떤 의미에서 당시 에로영화 바람에 제자리를 빼앗긴 영화였던 셈이다. 또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정부의 제안으로 임 감독은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다큐멘터리- 본인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다는!- 도 만들기도 했다.
1990년대 -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등극하다
<비구니> 사태로 첫 단추를 잘못 꿰어 악연이 될 뻔한 제작자 이태원(태흥영화사 대표)과의 인연은 이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작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90년 최고 흥행작인 <장군의 아들>이 이태원과의 인연으로 태어났던 것.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백치 아다다> 등이 해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따내면서 기쁨 못지않게 초조감을 느끼기 시작한 그에게 이태원은 난데없이 깡패 김두환을 소재로 한 액션영화를 제안했다. “영화제에서 뭔가 성과를 얻을 작품을 구상할 때라 몹시 언짢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아무도 기억 못하는 60년대 액션영화 감독으로서 자신의 변화가 스스로도 궁금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90년대는 바야흐로 표현의 자유가 스크린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파업전야> 상영으로 극단 아리랑 대표였던 김명곤이 불구속 입건되는 등 파동이 있었지만 <오! 꿈의 나라> <부활의 노래> <닫힌 교문을 열며> 등 이른바 ‘운동권’영화들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고 빨치산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다룬 <남부군>이 흥행에 성공했다. 이 시점에서 소설가 조정래의 제안을 받아 임권택은 <태백산맥>의 영화화를 구상했다. 그런데 시나리오화 작업이 지체되면서 쉬어가는 작품으로 만든 게 <서편제>였다. <서편제>로 명실상부한 흥행감독뿐만 아니라 작가감독으로서도 인정받게 됐지만 <태백산맥>의 제작은 수난이었다. 그는 <태백산맥> 제작을 앞두고 한 일간지에 자신이 좌익 집안 출신임을 커밍아웃하며 출사표와 같은 글을 기고했다.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황당한 제목으로 뽑힌 기사 탓에 빨갱이 자식에게 그런 영화를 만들게 해선 안 된다는 항의가 빗발쳤고, 촬영장에는 지역경찰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했으며 개봉을 하지 말라는 우익의 협박도 멈추지 않았다.
90년대 역시 모든 작품이 작가의 마스터피스는 아니었다.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다”는 임권택의 지론은 본인이 원하지 않던 <장군의 아들> 2, 3편을 결과적으로 졸속 개봉시켰고, <창> 역시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추석개봉에 맞춰 감독 스스로 무리한 촬영강행을 하느라 “역시 아쉬운 게 더 많은 작품”으로 남게 됐다.
2000년대 - 그리고 거장의 고뇌는 계속된다
9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변화와 성장의 시기를 거쳤고, 임권택은 <춘향뎐>으로 밀레니엄의 첫문을 기분 좋게 열어젖혔다.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칸영화제에서 본선에 오르고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타며 명실상부한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그러나 ‘직업인’ 임권택은 여전히 피가 마르는 작업을 한다.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사전제작 단계에서 오랜 파트너인 이태원 대표가 발을 빼면서 임권택은 60년대 먹고살기 위해 영화를 만들 때처럼, 70~80년대 정권의 눈치를 볼 때처럼 90년대 흥행을 하면서도 안도하지 못했던 것처럼 고뇌와 불안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역설적으로 이 긴장과 불안은 그를 원로가 아닌 젊은 현역 감독으로 각인시킨다. 그래서 100번째라는 숫자는 괄호를 닫는 것이 아니라 이후로도 길게 이어질 목록- 한국영화의 그리고, 임권택 영화의- 의 중간쯤에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