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전작을 떠올려보면 차기작 <하나>는 여러모로 의외의 선택으로 보인다. 버림받은 아이들의 생존 실화를 담은 <아무도 모른다>나 죽은 자의 기억을 파고드는 <디스턴스>, <원더풀 라이프>에 비하면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물 <하나>는 시종 밝고 따뜻한 웃음으로 가득하다. 곧 국내 개봉할 신작 <하나>의 홍보차 한국을 찾은 고레에다 감독에게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동시대 일본의 아픈 기억을 찌른 당신의 전작을 생각하면 시대극을 선택한 것은 의외로 보인다.
=원래 멋진 사무라이 이야기보다 서민이 주인공인 라쿠고(일본 전통 만담 예술의 일종)에 끌렸다. 사무라이가 주인공인 시대물 중에선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의 <백만냥의 항아리>, 가와시마 유조 감독의 <바쿠마쓰 다이요덴>, 그리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밑바닥>처럼 한량 같은 사무라이와 가난한 달동네 사람이 주인공인 영화가 좋았다. <하나>를 만들 때 의식한 이야기는 ‘츄신구라’라는 유명한 사무라이 복수담이다. 일본에선 일종의 영웅담인데, <하나>로 그걸 뒤집어 우스운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다.
-한 인터뷰에서 <하나>를 만들게 된 계기로 9·11 테러를 꼽은 적이 있다.
=9·11을 계기로 세상에 복수가 만연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시대가 복수를 원할 때 복수를 선택하지 않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대단한 반전의 메시지를 담으려고 한 건 아니다. 내가 원래 어깨에 힘을 뺀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가볍게 비꼬는 방식의 우스운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극영화이면서도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연출이 인상깊었던 전작에 비해 이번 영화는 순수한 픽션이다. 당신은 정해진 연기를 카메라에 담는 영화는 의미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그 생각은 여전하다. 그래서 프로 배우와 일한 이번 작품에선 연기가 연기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화면에 한 줄기 비춰 들어오는 빛이나 불어오는 바람 같은 자연 요소를 더욱 중요하게 활용했다. 주인공 소자에몬이 소데키치에게 맞는 신이 있는데, 그때 한쪽에서 꼬마가 지붕 밑에 빛이 들어오는 걸 보고 손가락으로 빛을 따라 그리며 장난치는 장면이 있다. 즉석에서 만들어낸 건데 참 마음에 드는 장면이다.
-감독의 의도 바깥에 있는 의외성을 포착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다. 머리에 생각한 것이 아닌 다른 것이 툭 튀어나올 때 가장 스릴을 느낀다. 그래서 현장에서의 의외의 요소에 민감하다. 의외성을 잡으려 하지 않고 내 머릿속의 이미지만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면 영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해야 할 것이다.
-전작들에 비하면 ‘죽음’이란 소재보다는 비천하지만 꿋꿋하게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사람들에 관심을 기울인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얘기를 덜 하려고 의식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어떻게 맺어가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란 점에선 지금까지의 작품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차기작은 어떤 영화가 될지 궁금하다.
=작은 가족의 이야기다. 할아버지, 할머니, 시집간 딸, 결혼한 아들과 며느리가 있고, 며느리가 딴 집에서 데려온 아기가 있다. 이들이 모두 한집에 모이는 하루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부자지간이기 때문에 더욱 소통이 안 된다는 점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7, 8월쯤 촬영에 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