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거친 바다를 건너온 영혼의 물결처럼, <와니와 준하>의 김희선
2001-10-17
글 : 박은영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인터뷰를 마치고 떠나는 김희선을 배웅하고 돌아왔을 때, 모두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정말 달라졌어, 김희선?” 사람들은 김희선이 달라졌다고들 한다. 현장에서 촬영에 임하는 태도나 스탭들과 호흡을 맞춰나가는 모습이 ‘전에 없이’ 진지하고 열정적이라고. 대체 이전의 김희선이 어떤 모습이었길래 사람들이 그녀의 견고해진 ‘프로페셔널리즘’이 무슨 ‘대변화’인 듯 떠들어대는 걸까.

평판이란 것이 그대로 믿기에도 무시하기에도 석연치 않은 것은, 말 옮기는 이의 사적인 감정으로 덧칠되게 마련이라서다. 그것이 호감이든 악감정이든. 일년 전 <비천무> 개봉 직전 만난 김희선이 소문(루머)과는 다른 사람이었듯이, 얼마 전 <와니와 준하>의 촬영을 마친 김희선 역시 촬영장에서 언론으로 퍼져나간 찬사를 모두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아주는 사람들, 순하고 편안한 시선이 그리울 것이다, 이제 그녀도.

비 내리는 저녁이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나타난 김희선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그녀임직한 패션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네크라인을 따라 보숭보숭한 깃털이 달린, 속살이 비치는 검은 민소매 셔츠, 옆트임이 깊은 진달래색 가죽 스커트, 망사 스타킹과 긴 부츠 차림은 ‘사진촬영용’이 아니라 ‘인터뷰용’이었다. 화려한 의상보다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짧게 자른 머리. <와니와 준하> 스탭들과의 첫 미팅 때 “저 머리 잘라야 되죠?” 하고 먼저 제안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김희선이 <와니와 준하>를 통해 선보인 변신의 면면이, 레이어드 단발머리와 바가지 커트, 한 듯 만 듯한 내추럴 메이컵, 목 늘어진 티셔츠와 추리닝 바지 패션만은 아니다. <와니와 준하>에서는 이제까지 보여주지 않은, 어쩌면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했을, 내성적이고 연약하고 머뭇대는 김희선의 모습을 보여준다. 설마, 김희선이? 그런데 정말이다.

“와니 같은 역할 진짜 해보고 싶었어요. 먼저 설명하긴 힘들지만, 만일 주어진다면, 놓치고 싶지 않은 그런 역할이었어요. 색깔이 뚜렷하지 않아서 힘들겠지만, 힘드니까 한번 해보자 싶었죠.” 김희선은 매니지먼트사에서 추천해준 시나리오들 중에서 맨 위에 놓여 있던 <와니와 준하>를 읽고, 나머지는 들춰보지도 않았다. 단숨에 읽고, 펑펑 울고, 전화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와니는 다정다감하고 쾌활한 연인 준하(주진모)가 있지만, 첫사랑인 이복동생(조승우)의 귀국 소식에 흔들리고 아파하는데, 김희선은 그 감정의 추이와 내면의 변화에 잘 녹아든 것 같다. 일과 사랑에 한두번쯤 격랑이 일고 지나간, 20대 중반의 와니는, 바로 김희선의 모습이기도 하니까. <비천무>의 혹평과 사진화보집 사건의 얼룩도, 이제 그녀 말마따나 “다 지나간 일, 끝난 일”이다.

인터뷰에 동행한 청년필름 관계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와니와 준하의 사랑이 아주 어른스럽게 표현됐다. 그 어른스러운 사랑을 ‘김희선’이 잘 소화해냈다.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듯 이 시대의 순정(純情)이, 2029세대의 보편적인 감성이, 성숙한 연기자의 고민이, 김희선 안에 살아 숨쉬고 있음을, 보게 되고 느끼게 되길 바란다.

사람들이 희선씨가 달라졌대요

<자귀모>나 <비천무>에서도 연기가 중요하긴 했지만, 그외의 효과에 더 많이 기대는 작품들이었잖아요. 이번엔 주인공에 초점이 맞춰지고, 배우들의 표정 하나하나로 만들어지는 영화니까,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어요. 실제 제 나이랑도 비슷하니까,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었고요.

<패자부활전> 때는 사랑 경험도 적었고, 전문직 여성의 삶도 몰랐어요. <비천무> 때 동생만한 애가 ‘엄마’라고 부르는데, 제가 모성애를 알았겠어요? 경험이 참 중요하더라고요. 와니는 이제까지 연기한 캐릭터 중에서 실제의 저와 제일 비슷했고, 그래서 하고 싶다는 열정이 막 생겼어요. 좋으니까요. 좋으니까, 열심히 한 거죠.

와니가 희선씨랑 비슷하다니요.

처음부터 이건 나다, 내 거다, 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저한테 와니를 맡기셨을 때는, 김희선에게 와니가 있다고 보셨기 때문이잖아요. 대본 연습보다는 개인적인 얘기를 많이 하면서, 나를 알아가고 또 와니를 알아갔어요.

처음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닮게 되더라고요. 이럴 때 와니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 많이 했어요. 촬영 없을 때도 털털하게 입고 다니고, 혼자 있는 게 좋아지고, 열 마디 할 거 한 마디하고, 스스로 주문을 건 거죠.

벗어나기도 어려웠겠네요

어린 시절의 와니는 지금의 나, 보여지는 나랑 성격이나 분위기가 비슷한데, 머리 커트하고 나중에 찍었어요. 그래서 편하게 할 수 있었죠. 첫사랑의 아픔을 딛고, (닭살스럽다는 표정)아, 이건 너무 공식적인 멘트다. 이루지 못하는 사랑,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마음의 문을 닫았다가, 준하 덕에 사랑을 되찾은 거잖아요. 시나리오 보고도 참 많이 울었는데…. 특별히 어려운 건 없었어요. 크랭크업하던 날, 어, 벌써 끝났네, 했어요. 그렇게 생각해보긴 처음이었는데.

스탭들이랑 잘 지냈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분위기 진짜 좋았어요. 다들 젊어서 친해지기도 쉬웠고, 많이 믿었어요. 편하게 해줘서, 편하게 연기했고요. 배우 힘으로 할 수 없는 부분까지 끌어내줬으니까. 감독님하고 대화도 많이 했지만, 배우는 카메라 앞에 서는 사람이기 때문에 촬영·조명감독님(<친구>의 황기석- 신경만 콤비)하고 친하게 지내려고 했고, 그래서 정도 많이 들었어요.

마치고 난 감회는요.

러시편집본도 못 봤어요. 안 보여주네요. 궁금해 죽겠어요. 그런데 못 볼 것 같아요. 너무 민망하고 겁도 나고. 하지만(단호하게) 결과가 어떻든, 후회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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