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그냥, 내 얘기를 했어,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박해일
2001-10-17
글 : 심지현 (객원기자)
사진 : 정진환

때늦은 에어컨 바람이 반소매 아래로 좁쌀만한 소름을 피워올리는 스튜디오 안, 촬영을 위해 켜놓은 램프가 어둠을 밀어내는 동안 박해일(25)은 내내 앉거나 혹은 선 자세로 채 가시지 않은 어둠 속을 배회했다. 낯선 공간과 친해지려는 듯 이곳저곳을 꼼꼼히 뜯는 그는 예민한 고양이 같았다. 불빛이 조금이라도 닿은 곳이라면 다가가 들여다보고, 만지고, 냄새를 맡았다. 다른 사람에게 묻거나 매달리는 법 없이 그렇게 혼자서 묵묵히 낯선 것을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오래 전부터 그의 방식이었다. 드디어 그를 기다리게 하던 카메라가 돌아가고 어깨 위로 조명기가 익숙한 빛을 토해내자 비로소 그의 얼굴에 편안함이 깃든다.

77년생 박해일의 신분은 학생이 아닌 연극배우다. 영화와 조우하기까지의 여정을 묻는 질문에 그는 “술먹어야 나오는 대답”이라며 한참이나 말을 아낀다. 96년 시작된 대학생활은 매일 다섯 시간이 넘는 통학시간과 무료한 학교생활 끝에 1년 만에 중단됐다. 그나마 취미를 붙인 음악 동아리에서 마지막 스쿨버스가 끊기기 전까지 악보에 고개를 파묻어 보았지만 매번 악기 대신 손에 들리던 청소도구로 인해 남은 의지마저 상실한 그였다. 학교를 나와 서초동에 자리한 재즈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그것은 ‘열정’이 아닌 ‘객기’였다. 계획없이 시작한 학원생활을 한달 만에 끝내면서 MBC <테마게임> 촬영부 보조로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방송사를 드나든 지 4개월쯤인가, 난데없이 댄스가수를 제안받고, 안무와 노래 연습을 시작했다가 불과 몇달 만에 음반 제작이 좌절되는 해프닝도 겪었다. 방송사와의 고달픈 인연을 끝낸 그는 체계적인 연기수업을 받기로 마음먹고 ‘동아예술단’이라 불리는 어린이극단을 찾는다. 1년간 예닐곱번의 지방 순회공연으로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게 된 그는, 99년 어린이날 기념 행사를 돕기 위해 성인극단 ‘동숭무대’에서 나온 배우의 눈에 띄어 성인극 무대로 자리를 옮긴다. ‘동숭무대’의 활동은 그의 연기폭을 무한대로 넓혀놓았고, 결국 임순례 감독의 눈에 띄는 계기도 되었다. 당시 <와이키키…>의 배우를 물색하던 임 감독이 우연히 관람한 작품이 동숭무대의 작품 <청춘예찬>이었는데, 나이 먹기를 거부하는 고등학교 2학년 ‘청춘’ 역이 바로 박해일이었던 것이다. 멋진 해변의 로커를 꿈꾸는 철부지 고등학생 ‘성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그를 임 감독이 가만 둘 리 없었다. 2개월의 촬영 동안 그는 참으로 편했다. 고요히 정지해 있는 카메라는 거울이고, 그 앞에서 목이 터져라 악을 쓰던 ‘성우’는 지난날 거울 앞에 서 있던 자신이었으니까. 술 대신 담배로 목을 축이며 긴 얘기를 마친 그에게 묻고 싶어진다. 극중 ‘성우’가 받았던 질문,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니 행복하냐?” 하지만 그의 눈빛을 보니 다시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박해일은 현재 박찬옥 감옥의 데뷔작인 <질투는 나의 힘>에서 주인공 이원상역을 맡아 새로이 연기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중이다. 내년 5월 쯤에는 한 단계 더 성장한 그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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