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영화로 통하는 다른 문을 발견하다
2007-04-19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이혜정
<천년학>의 오승은

동호(조재현)는 송화(오정해)를 가슴 한켠에 보석처럼 품고 있다. 그 동호가 불쑥 나타난 여인 단심(오승은)의 입술에 속절없이 쓰러진다. <천년학>의 마디가 또 하나 생겨나는 순간이다. 창극단 스타 단심이 알맞게 팜므파탈적이어서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예서 그쳤다면 단심이라는 캐릭터가 송화의 또 다른 분신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또 배우 오승은이 시사회 무대인사에서 “배우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정말 많은 걸 느꼈다”고 심상치 않게 말했을 리 없다. 단심의, 오승은의 살짝 말려올라가는 입꼬리는 관능적인 동시에 서글픔을 머금는다. 촉촉한 눈빛도 이중의 사연을 담고 있다. 송화가 인고의 꼬리를 붙잡고 세상을 버티지만 가진 것도 못 가진 것도 없이 스러지는 여인이라면, 단심은 욕망의 미덕으로 세상을 누리다가 버릴 것도 줄 것도 없이 꼬꾸라지는 여인이다. 그들은 왼쪽과 오른쪽을 대칭처럼 이루는 서로의 분신이다. 슬플 때 울지 않고, 기쁠 때 웃지 않는 표정으로 그 세월을 만들어내야 한다. 100번째 작품을 감독하는 대가의 눈에 차도록 지어내야 한다. 그건 지어낸다는 행위를 지워내야 가능했다.

“이렇게 확신이 안 드는 연기는 처음이라 너무 불안했어요. 단심이란 캐릭터에 접근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게 하나도 없거든요. 단심의 배경이 많이 보여지지 않지만 내면이 아주 복잡해요. 그를 내 몸으로 받아들여서 그 시대의 내 삶처럼 살았어요. 물론 이건 임권택 감독님의 깊은 연륜이 자연스레 끌어내주신 것이죠.”그건 인물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었고, 배우이자 여자인 스스로를 채워준 성숙이었다.

“그동안 나름의 연기관이 있었는데 그 한쪽 문으로만 드나들다가 이렇게도 저렇게도 드나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예컨대 이런 거예요. 선배가 뭘 사오라고 하는데 돈이 없는 거예요. 난감한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주머니를 뒤진다거나 하잖아요. 그런데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돈이 없는 사람은 자기 주머니에 동전 몇푼 들었는지 다 안다. 그러니 주머니를 볼 필요가 없다’.”

<천년학>을 거치면서 배우로서의 욕심이 생겼다고 한다. 배우로 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여겼는데 이제 “쉽게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갈 수 있을 것 같은 신중함을 얻은 듯”하니 “사람냄새 나는 연기자 오승은”으로 불리고 싶다는.

그렇다고 오승은의 연기가 슬쩍 묻히는 종류는 아니었다. <두사부일체>에서 교사에게 하염없이 구타당하던 여고생은 분노와 연민을 충분히 일으켰고, 시트콤 <논스톱4>에선 오서방이라는 털털한 성격과 서구형 미녀의 외모를 대비시키면서 아이돌 스타의 이미지를 지어냈다. 그리고 배슬기, 추소영과 더불어 프로젝트 그룹 ‘더 빨강’으로 가수 데뷔까지.

“더 빨강을 할 수 있었던 건 가수라는 캐릭터를 맡아 연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대사를 노래로 한다는 것이었죠. 연기는 대본과 콘티 등 정해진 틀 안에서 해야 하는데 가수는 그런 틀을 부술 수 있는 무대에 오르잖아요. 무대에서 관객을 앞에 두고 3분 안에 다 보여줘야 한다는 매력이 있었어요. 그렇게 틀을 깨는 경험이 없었다면 <천년학>을 소화하지 못했을 거예요.”

고등학생 때 연극으로 연기를 접한 뒤, “연기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소도구이고, 영화 속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라는 걸 느껴본 적이 있을까. 모든 말을 <천년학>으로 열고 닫는 그에게 지금이 분기점이 될 것은 명확해 보인다. 단심으로 계속 살고 싶은 맘이 비로소 정리될 때쯤 “신중해진 작품 선택의 기준”으로 그 방향을 가늠할 것이다.

스타일리스트 이선희·메이크업 김청경 헤어퍼포모·의상협찬 egoist·신발협찬 THE SHOE·액세서리 협찬 J.J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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