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대 중반을 넘어서니 왕자님을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엔딩, 그 너머의 쪽박 깨지는 소리만 들려온다. 회사에서 잘리고, 이혼을 하는 건 여기에 끼지도 못한다. 누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더라, 누구는 배우자가 진 빚더미 탓에 외국으로 야반도주했다더라, 거기에 이제는 아이의 불치병이나 장애까지 끼어드는 지경이다. 이래저래 심란한 말만 듣고 칙칙한 일만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우리팀 팀장은 “<우아한 세계>나 한번 더 봐야겠어”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러시겠지. 왜 아니겠나.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은 밥벌이의 전사들이 아닌가.
인생 참 뜻대로 안 돌아간다. 암흑계의 대부가 되겠다는 거창한 야심을 품은 것도 아닌데 후줄근한 밥줄 하나 건사하기 힘들다. 집에 오면 아이가 달려나와 볼에 뽀뽀하며 “아빠 힘내세요” 노래를 불러주기를 기대한 것도 아닌데 애는 차라리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단다. 지금 누구 때문에 더러운 꼴 보며 이 생활하는데 아내는 집을 나가서 이혼하잔다. 영화 초반 허우적대는 자신의 똘마니들을 보면서 강인구가 했던 말이 절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아름답다, 아름다워….”
왜 그렇게 사냐. 질문은 쉽게 할 수 있다. 왜 빠져나오지 못하고 깡패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데? 왜 지질한 박봉에 인정도 안 해주는 회사를 때려치우지 못하는데? 왜 알량한 아파트 한채 소유하는 데 그렇게 집착하는데? 왜 머리도 안 좋은 애새끼 유학 보낸다고, 대학 보낸다고 돈을 처바르는데? 대답은 쉽지 않다. 무능해서, 줏대없어서, 속물이야, 라고 잘라서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결국 ‘왜 사냐’를 거쳐, ‘왜 태어났냐’는 지극히 존재론적인, 끝내 하나마나 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애당초 우아한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강인구가 깡패세계를 은퇴한다면, 가족을 하나로 묶을 넓은 집을 포기한다면, 남들 다 간다는 조기유학을 보내지 않았다면 그에게 다른 세계가 펼쳐질까. 어차피 인생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지옥이 수렁처럼 그의 발을 잡아당길 것이다. 필요한 건 지혜로운 선택과 과감한 결단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처럼 어쩔 도리 없는 인생의 악의를 모른 척하고 그냥 묵묵히 사는 것 말고 다른 게 있을까.
조용히 들어가려고 했는데 투덜군이 안녕의 글을 쓰는 바람에 덩달아 독자 여러분께 인사드린다. 그동안 보내주신 성원, 특히 <록키 발보아>에 관한 글에 보여주셨던 열화와 같은 성원에 감사드린다. 너무나 많았던 리플과 이메일에 드리지 못한 답장을 대신해 한말씀 올린다. “무뇌충아, 꺼져라”, “된장녀야, 찌그러져 있어”라고 진심어린 권유를 하셨지만 그 말씀을 과감하게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마감이 돌아오면 다시 꾸역꾸역 노트북 앞에 앉아야 하는 이 처지가 바로 인생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