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20분. 휴대폰이 울렸다. 박신양이 벌써 이쪽으로 출발했다는 연락이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인터뷰는 오후 1시가 아니냐 되물었다. “무슨 일인지 그쪽 가서 메이크업을 하시겠대요.” 급히 스튜디오 문을 열고 인터뷰 준비를 마쳤다. 30여분이 지나고 편안한 옷차림에 백팩을 둘러멘 다소 낯선 모습의 박신양이 도착했다. 인사를 나눈 뒤 구석의 소파에 자리를 잡은 그와 메이크업, 의상팀을 비롯한 그의 군단은 이어 보기 힘든 풍경을 연출했다. 오렌지며 바나나를 꺼내놓는가 하면 김밥과 라면 등 점심거리가 될 만한 분식을 날라왔던 것.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친 박신양은 배낭에서 칫솔, 치약을 집어들었고 그동안 그의 팀이 가져온 아이팟에선 팝송부터 그가 직접 부른 노래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사진 촬영 중에도 아이팟의 리모컨을 놓지 않던 그는 마음에 드는 노래를 때에 따라 세심하게 선별하곤 했다. “보통 이런 델 많이 다니잖나. 스튜디오, 낯선 공간. 만날 낯설기만 하면 내 인생도 낯설어질 것 같아서. (웃음)” 그의 대답에서 낡은 컨테이너에 불과한 자신의 공간을 아기자기하게 꾸미던 <눈부신 날에>의 우종대가 떠올랐다. “나쁜 사람”이자 “양아치”인 우종대는 혼자일 수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지만 자신을 믿고 따르는 우준(서신애)이라는 아이를 만나 기적과도 같은 눈부신 한때를 체험한다. 그렇다면 자기 것을 아끼고 사랑하듯 “솔직하고 순수하게” 그리고 “영화에서만은 모든 것을 잊”은 채 연기한다는 그가 <파리의 연인> 이후 2년 만에 출연작을 들고온 심경은 어떨지. <눈부신 날에>와 5월 방영 예정인 드라마 <쩐의 전쟁>을 기다리는 박신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 무척 일찍 왔는데 보통 촬영장에 먼저 가서 준비하는 편인가.
=늦는 것 무척 싫어한다. 우리의 약속은 전쟁터의 규칙이라고 10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연극 학교의 철칙이다.
-<파리의 연인> 이후 한동안 활동이 뜸했다. 그동안 뭘하며 지냈는지.
=글쎄. 뭐했지? 그냥 열심히 살았다. 영화 찍었고 음반도 만들었고 뮤직비디오도 프로듀싱했고 책도 만들었고 사진집도 찍었고 일본에 가서 공연 겸 팬미팅도 했고 일본 사람들이 많이 환호했고. 음, 악수만 하는 팬미팅은 싫어서 준비 진짜 많이 해서 갔더니 좋아하더라. 영화 찍다가 허리 디스크가 악화돼 재활치료 받느라 한동안 고생했고.
-<눈부신 날에>는 어떻게 선택하게 됐나.
=친구가 하자고 그랬다. (웃음) 정훈탁. 결정적인 이유는 그 친구였다.
-뭔가 다른 이유도 있지 않았나. 예컨대 시나리오가 좋았다든가.
=시나리오에서 마음에 든 점? 아이와 아빠의 이야기라는 것. 상당히 감동적일 수 있겠다는 것. 반면에 충분히 진부할 수도 있는 시작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신경 많이 써야 할 거다, 그런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 신경을 썼나.
=감동을 주려다가 죽도 밥도 안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그렇게 안 되도록 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려고 노력했다. 무서운 영화에서 무서운 장면을 위해 나머지 부분도 전부 다 무섭게 만들면 그 영화는 무서운 영화가 아닐 거다. 이것도 슬픈 장면이 분명히 핵으로 존재하는데 나머지 장면들을 그걸 위해 준비해가면 재미없는 영화가 될 것 같았다.
-이번에 처음으로 아역배우와 호흡을 맞췄다. “내 생애 최고의 파트너는 신애”라고 극찬을 했는데 서신애와의 연기는 어땠나.
=퍼펙트하게 좋았다. 신애는 연기를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진짜 알맹이스러운 모습을 항상 보여줬다. 그런 파트너하고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나는 처음부터 이런 건 하지 마라 얘기한 적이 없다. 마음대로 해라. 처음에는 엉뚱한 소리를 많이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작품과 가까운 생각을 자연스레 하면서 누가 연기를 가르칠 필요가 없는 아주 훌륭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촬영장에서 함께 놀기도 했나.
=같이 밥먹고 같이 쉬고 끝나면 수영장 가서 수영하고. 서로 옷 갈아입는 거 훔쳐보고.
-실제로도 네살 난 딸이 있어 연기에 몰입하기 쉬웠을 것 같다.
=그렇다. 멀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거니까.
-극중 우종대의 인생은 준이를 만나며 많이 바뀌는데 스스로도 딸이 태어난 이후 많이 바뀌었나.
=세상의 모르는 것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 나의 아이라는 것, 작은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작은 고양이, 작은 개, 작은 새, 그것들의 소리, 작은 움직임, 불쌍한 것들, 가여운 것들, 조그만 것들에 대해 다시 보게 됐고 느낌이 생겼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
=체력과 정신력이 바닥나서 쓰러진 적이 있다. 앰뷸런스에 실려갔는데 그렇게 한번 수술을 받으면 모든 근육이 다 풀어지기 때문에 재활을 하기 위해선 기를 쓰고 운동을 해야 한다. 그 뒤로 다시는 다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히트작도 많이 냈는데 지금까지 연기한 캐릭터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사람들이 쉽고 재미있게 받아들인 캐릭터들이 나도 좋다. <파리의 연인>이나 <약속>도 그렇고 <범죄의 재구성>도 그렇고. <약속>은 참 투박하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영화다. 다시 봤는데 끝까지 다 보게 되더라. 거기도 진짜스러운 게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지에 별반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실제의 당신은 어떤 사람에 가깝나.
=와, 그게 참 나도 모르겠단 말이다. 진짜 분명한 건 별 볼일없고 재미없고 평범하고. 한마디로 지루따분한 사람이다. (웃음)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지금처럼 좋은 작품 골라서 또 최선을 다해야지. 영화 100편 만들어야지. 할 일이 태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