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나이 먹으니까 옛날처럼 하는 게 재미없다
2007-04-25
글 : 김도훈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아들>의 장진 감독

장진의 신발. 진분홍색 천에 하얀 해골이 점점이 박혀 있는 탐스러운 컨버스화다. 격렬하게 탐이 났다. “어디서 사셨어요?” “차승원이 일본 갔다오면서 사줬어. 진짜 끝내주는 신발을 사왔다더라고. 근데 이거 완전 미친놈 신발 같지 않아?” 삑. 반칙이다. 장진은 지금 진심을 말하고 있지 아니하다. 100m 전방에서도 눈에 탁 튀어들어오는 진분홍색 해골 컨버스화. 신은 자의 은근한 자긍심이 그토록 도드라지는 천을 발에 휘감고서 거짓말을 하다니.

장진의 영화. <아들>은 노골적으로 구식인 제목과 신파를 휘두른 영화다. 15년을 감방에서 살아온 무기수가 아들을 만날 수 있는 단 하루의 휴가를 갖게 된다. 아버지는 떨린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핏줄이다. 평생 단 한번인 휴가를 나와서도 깜빡 기차간에서 잠들어버리고, 그것이 또 못내 원망스러워서 자기 머리를 쥐어박는 이 남자. 장진의 남자다. 기막힌 사내다. 킬러다. 동치성이다. 세상이 좀처럼 귀기울이지 않는 순수한 인간이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아들을 만나고, 서먹서먹해하던 아들은 처음으로 입을 연다. “창문 좀 닫으면 안 돼요?”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기 전까지는 서로를 진심으로 알지 아니한다. 그건 <아들>을 곧 마주하게 될 관객과 장진의 사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좀 아작아작 캐물었다.

-결혼 축하드린다.
=(웃음) 뭐. 근데 뭘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더이상 묻지 말라는 듯 묵묵부답)

-<아들>을 보고 나오면서 고민에 빠졌다. 개봉 전의 인터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자세한 문답을 모조리 실을 수는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아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된 건가.
=기획팀이 무기수와 아들이 하루 동안 제3의 공간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낸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가져왔다. 기획팀한테 울었냐고 물어봤더니 다들 울었다데. 그래서 다시 물었지. 아니. 저런 건 ‘쌩’(生)인데 내가 가짜를 만들어서 울릴 수 있겠느냐. 그렇게 울리면 뭐가 그리 즐겁겠느냐고. 차라리 줄거리를 아예 다르게 만들어서 아주 영화적으로 한번 써보겠다고 했다.

-감독님 영화 중에서도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가장 단순한 이야기다. 24시간 동안 벌어지는 일이고 공간도 지엽적이다.
=지금까지 내 영화들에 곁가지와 욕심이 너무 많았다는 소리겠지. (웃음)

-<아는 여자>는 열흘 만에 초고를 마쳤다고 했다. <아들>은 오히려 한번에 써내려가기 어려웠을 텐데.
=딱 하루 걸렸다. (웃음) 필이 팍팍 왔다. 시나리오라기보다는 소설처럼 썼고, 20장짜리 트리트먼트가 하루 만에 완성됐다. 그걸로 캐스팅도 하고 다 한 거다.

-아무리 그래도 그걸 하루 만에 어떻게 썼다는 건가.
=미리 며칠을 생각하고 났더니 쓰고 싶은 정서가 절로 오더라. 아버지가 병중이셔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고보니 외출 심사받는 장기수 역으로 아버님이 직접 출연도 하신다.
=그게 너무 이슈가 되니까 민망하다. 그냥 소박한 사사로움에 한 일이다. 결혼을 결정하고 나니 와이프될 사람에게 미안하더라. 우리 아버지가 원래는 참 재밌으신 분인데, 몸이 온전한 상태였다면 많이 사랑해줬을 텐데. 그러다보니 내가 애를 낳으면 할아버지의 모습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도 고민이 됐다. 그래서 기념으로 아버지를 영화 속에 찍어두기로 한 거다. 소박하게 생일선물을 준비하는 심정. 왜 이 나이 되면 그런 생각도 하잖나.

-남자들이 아버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마침내 늙은 거라고들 한다. (웃음) 아버님은 어떤 분이었나.
=우리 아버진 타고난 장사셨다. 한국적으로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주의적인 분. 또 한편으로는 강한 사람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여주신 분이기도 하다. 좋았던 거라면, 여하튼 나의 길에 대해서 큰 강요가 없으셨다는 거다.

-좋은 아버님이네.
=장단점이 있겠지. (웃음)

-무기수 아버지 역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자연스레 정재영을 떠올렸다. 왜 차승원이었을까.
=정재영이 튕기더라고. (웃음) 처음에는 16mm로 찍는 5억∼6억원짜리 저예산영화로 생각했다. 그러다보니까 한 2천만원 줄 테니까 해보자고 선뜻 권할 수 있는 배우가 없었다. 정재영은 <거룩한 계보> 직후에 곧바로 다시 뭉치는 게 좀 부담스럽기도 했고. 주인공의 나이를 높여서 송강호나 최민식, 한석규를 생각했으나 캐스팅이 잘 안 됐고, 그렇다면 주인공의 나이를 낮추어서 가보자 싶었다. 그랬더니 바로 차승원이 떠오르더라. 연기력에서도 전혀 의심이 없었던 배우고.

-무기수 아버지와 차승원. 쉽게 매치가 되는 조합은 아니다. 이 배우의 어떤 면모에서 확신을 얻은 건가.
=처음엔 저예산이라 돈 못 준다고 했다. 조금만 달라더라. (웃음) 그래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조금만 줄 거라고 했지. 차승원 개인적으로는 나이를 한두살 먹어가는 자기 애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더라. 그러저러한 차승원의 개인적인 역사가 겹치니까 특별한 느낌이 왔다. <아들>의 대사 중에 이런 것도 있잖아. 차승원이 류덕환보고 “스물 갓 넘은 나이라 짐스러웠어, 많이”라고 고백하는 대사. 차승원 스스로도 주인공과 똑같이 스무살에 아들을 낳았다.

-이미 차승원과는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 작업한 적이 있다. 자기 스타일이 있는 스타고, 장진 사단 배우들과는 접근법이 다르지 않나.
=내가 원하는 디렉션을 다 주고 나면 자기 나름대로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스트레이트하게 말해준다. 나는 나스럽게 해야 해. 내 신체 등 모든 게 동하지 않으면 너무 불편해. 그러면 나는 그냥 차승원스럽게 하라고 요구한다. 배우가 자기스럽게 날뛰든 뭘 하든 내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다. 그것도 못하는 사람은 감독이 아니지. 또 차승원이라는 배우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아주 공격적이다. 그게 참 좋다.

-전작들과는 달리 <아들>은 온전히 두 사람만을 따르는 영화다. 그래서 내밀한 내레이션과 클로즈업이 대단히 빈번하게 쓰인다.
=사실 내레이션이나 미장센에 관련된 부분은 감독이 선택하기 나름이다. 콘티도 없는 놈이 뭘 그리 예상하고 찍겠나. 순간순간 장면을 대할 때의 느낌으로만 간다. 저 얼굴을 보고 싶다. 둘이 어떤 공간에 있을 때 그 공간의 느낌을 보고 싶다. 이런 식으로 가는 거다. 감독 입장에서 선택하고 취합할 게 너무 많다.

-장진 영화에서 초반부터 캐릭터가 완전히 납득 가능한 것은 <아들>이 처음이다. 언제나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건조하게 에둘러 캐릭터에 다가가지 않았나.
=근데 되게 편한 게 뭐냐면 말이다. 전작들에서는 사건을 먼저 만들고 배우가 거기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여부에 따라 캐릭터가 결정됐다. <아들>은 다르다. 이 남자가 스무살에 아들을 낳았고 이제 15년이 흘렀다. 이런 상황만 던져주면 모든 게 명확하다. 15년 만에 아비를 만난 놈이 처음으로 한다는 말이 “창문 좀 닫으면 안 돼요?”다. 근데 그걸 보고 저 새끼 왜 저러냐고 하지는 않는다. 관객은 그냥 공감하게 된다.

-시사회 직후 나왔던 모 언론의 기사 봤나. 극의 중요한 반전에 대해서 ‘관객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고 씹었던데. 사실 일반 시사를 봤더니 어떤 관객은 좀 혼란스러워하는 눈치기도 했다. 애초에 모종의 반전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던 건가.
=물론이다. 근데 말이지. 비평이라는 게 아직까지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든든한 화력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믿는다. 잘 써달라는 게 아니다. 씹더라도 보편적인 것들 안에서 씹어달라는 거다. <아들>의 드라마가 이런 방식으로 간다면 어떤 오류가 있을지를 자세히 연구 좀 해서 씹으라는 거다. 시사회 바로 다음날 나오는 리뷰의 경우, 칭찬을 하려면 바로 써도 괜찮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조금 시간을 두고 썼으면 좋겠다. 나도 <씨네21>에 ‘이창’ 칼럼 하나 쓰는 데 며칠이 걸렸는데 말이야. (좌중 웃음) 그리고 <아들> 시사 이후에 블로그들을 좀 검색해봤다. 요즘 애들 글발 죽이거든. 그런데 얘네들 중 80~90%가 영화 속 반전이 통속적인 신파가 될 수 있는 안전장치라는 것을 잘 이해하더라. 모 언론처럼 반전이 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게 아니다.

-<아들>은 어쩌면 가장 영화적인 장진의 영화다. 지난 10년간 지속적으로 너무 연극적이라는 평들을 들어오지 않았나. 연극적이라는 말을 벗기 위해 오히려 연극을 가져왔던 실험 <박수칠 때 떠나라>는 결국에 연극적으로 귀결된다는 평을 받기도 했고.
=솔직히 연극하는 사람들도, 연극 잘 아는 사람들도, 연극 흐름의 가운데 있는 사람들도, 나보고 연극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비영화적이라는 것을 연극적이라고 싸잡아 표현하면 안 된다. 또한 관습적으로 익숙한 영화가 아닌 것들을 모조리 비영화적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 게다가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감독이 있는데 나 같은 놈도 하나 있어야지. 다 똑같이 만들면 뭐해. 이젠 정말 신경 안 쓴다.

-아까 ‘대중’과 ‘보편’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장진의 대중영화는 뭔가. 장진은 대중적인 감독인가.
=나는 재미가 없는데 대중이 재밌다고 해서 그대로 만들 수는 없을 것 같다. 급선무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대중이 좋아하는 것 사이의 공유 지점을 많이 만들어가는 거다. 대중의 웃음을 나도 이해하고 좋아해야만 한다.

-솔직히 그거 에고를 누르지 않는 이상 아주 어려운 일이다.
=얼마 전에 <이장과 군수>를 봤다. (옆방에서 옷 갈아입던 차승원, “<이장과 군수> 이야기 그만 좀 해!”) 관객이 웃을 때 나도 웃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 오락적인 영화라는 것은 대중이 영화를 통해서 예전처럼 학습이나 구원을 받는 게 아니더라도, 영화의 가장 소박한 예술적 목표도 이루면서 유희적인 측면도 해내는 보편적인 대중영화가 아닐까. 그러려면 빨리 대중이 좋아하는 웃음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이 ‘장진의 재기’라고 하는 것을 일부러 누르면서 가는 것도 그 때문인가. 그건 아주 대중적인 게 아니니까.
=억지로 하는 건 아니다. 내가 나이를 먹는 거다. 나이 먹으니까 옛날처럼 하는 게 재미없어지는 거다.

-대중과 비평계는 다르다. 비평계는 예전의 장진이 지닌 그거(!)가 나오지 않는다고 못내 아쉬워한다.
=맞아. 맞지. 근데 예전에 그거(!)가 대체 뭔데? 영화 만든 지 겨우 10년 됐다. 앞으로 만들 작품이 더 많은데 옛날 타령만 하면 어쩌나. 이전 영화들은 내 자신의 영화적인 필드 메뉴얼이 정리되기도 전에 나왔던, 극소수에게만 추앙받은 영화들 아닌가. 그걸 가지고 한 감독의 작업적 노선을 규정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장진의 감독론이 뭐가 있겠어. 이거저거 만드는데 가끔 가다 웃기기도 하고, 또 자기 색깔도 좀 있는 것도 같고. 더 웃긴 게 뭔지 아나. 다른 감독의 영화를 비평하면서 장진이 만든 것 같다고 말하는 거다. 실례지 실례. 이장호, 배창호나 임권택과 비교하면 이해는 하겠다. 그들은 질곡의 세월에서 20년 넘게 해낸 고유의 색이 있잖아. 심지어 더 웃겼던 건 “내가 보기에 상황 대사가 가장 날렵하고 재치있었던 감독은 장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달콤, 살벌한 연인>의 손재곤 감독이라고”라는 평이었다. 충무로에서 재치 1등, 2등을 논하는 방식이라니….

-누구냐 그게.
=나도 몰라. 요는 나 역시도 참 논하기가 힘든 주제라는 거지. (웃음)

-어쨌거나 <아는 여자> 이전과 이후의 장진 영화는 확실히 이야기를 거는 방식이 다르다.
=담담하게 툭툭 던져놓기 시작한 거지. (웃음) 요즘은 뭘 툭 던져놓는 게 좋다. 그래서 <아들>은 나에겐 아주 좋은 코미디다. 남들은 모르는데 나 혼자 너무 재밌어하는 대사들이 있다. 류덕환이 물속에 들어가니까 차승원이 “아들이 잠수를 했습니다”라고 하잖아. 그 대사는 집 나간 아들에게 아버지가 “이 새끼 잠수탔네”라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 남들은 캐치 못하는데 나는 그게 너무 좋은 거다. (웃음) <아는 여자> 때부터 그런 감정이 좋아지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대중적으로 편해졌다고 칭찬을 받았다. 다행인 것은 억지춘향으로 바뀐 게 아니라 나이 들면서 그런 자소적인 농담들, 철학이 있을 것도 같은데 속이 빈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그런 농담들이 좋아진 거다.

-<아들>은 인건비 절감을 통해 제작비를 축소한 사례로 요즘 지속적으로 언급된다.
=7억원 정도 절감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인건비를 깎자는 게 아니다. 다만 시스템적으로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해보자는 거였다. 무조건 인건비를 줄였다는 개념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그런 건 정말로 위험한 짓이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받아야 할 인건비를 다른 구조로 돌린 거고, 양보한 뒤 손익분기가 넘어서면 다른 방식으로 받는다는 거다. 그러나 <아들>은 지금 영화시장에서 위험한 사례일 수 있다. <아들>이 잘돼서 스탭과 배우들이 보너스를 많이 받았다고 쳐보자. 그럼 다른 영화사들도 인건비 한번 팍 줄여서 가보자고 너도나도 나설 거 아니냐. 영화시장 안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어서는 안 되는 사례인 것 같다.

-이제 ‘필름있수다’가 먹어야 하고 가꾸어야 할 파이도 창작집단이었던 1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사업가 혹은 제작자로서 가지고 있는 고민은 뭐가 있을까.
=우려스러운 게 있다. 지금 한국의 엔터테인먼트에 불고 있는 이상한 비대함 말이다. 까닭 모를 증자들이 늘고 있다. ‘필름있수다’는 너도나도 하고 싶은 프로젝트에 투자할 자본이 없는 경우에만 증자를 한다. 증자의 50% 이상은 일반 투자자의 개인 자본들이다. 그들의 자본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우리가 져야 한다는 거다. 한국의 영화판은 아직 일반 투자자들의 수익을 책임져줄 만큼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장을 하려면 분명한 책임감이 필요하다. 적어도 ‘필름있수다’만큼은 그러지 말자는 인식이 있다. 살림도 줄이고 식구도 줄여서 앞으로 2~3년 안전하게 기획할 수 있는 집단으로 가자는 거다. 꼭 제작을 하고 싶은데 시드머니(Seed Money)가 필요하면 그때 증자를 하면 된다. 투자자들을 만나서 설명회를 갖고 증자를 해야만 진짜로 값진 증자다.

-차기작은 황망하게도 SF사극인 <애일리 안첨지>다. 조선시대 임금에게 진상할 벼를 키우는 논에 미스터리 서클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라던데.
=기획은 가고 있지만 어떤 작품을 하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서너개의 작품을 항상 머릿속에서 돌리고 있다가 (손을 머리끝까지 올리며) 이만큼 차면 글로 쓰기 시작한다. 이번에 결혼하면서 은행 융자 받아서 전월세 들어간다. 나중에 융자 갚기 위해서 뭘 좀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야 비로소 글이 기어나오지 않을까. 창작의 근원은 빚이거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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