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아에서 한국까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크리스티앙 바소가 서울에 발을 내디뎠다. 이창동 감독의 신작 <밀양>에 음악을 입히기 위해서였다. 한밤이 한낮으로 돌변하는 시차도, 불편하기 그지없을 언어 차이도 그에겐 큰 어려움이 아니었던 것일까. 이창동 감독과의 작업을 “마술 같은 과정”이라 표현한 바소는 그러나, 인간의 힘을 넘어선 만남의 순리를 이해한 눈치였다. 이번 서울행 역시 애초 우연에 우연이 덧붙여진 기묘한 인연에서 시작했다. 이창동 감독이 부에노스아이레스영화제에 초청받지 않았다면, 그곳 자원봉사자에게 바소의 앨범을 선물받지 않았다면, 혹여 그렇더라도 수록곡들, 특히 ‘이방인’이라는 제목의 <크리올료>(Criollo)에 귀기울이지 않았다면, 아니, <밀양>의 음악작업을 제안하는 메일을 바소가 무신경한 클릭 한번으로 삭제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일이었다.
“이번 작업은 운명에 감사해야 할 기회다. 연락처 하나 모르는 상황에서 내 웹페이지를 찾아 메일로 연락했더라. 아르헨티나에서 이창동 감독의 전작을 찾아보려 했는데 그게 힘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구할 수 있었던 게 <오아시스>였다. 쉬운 영화는 아니었고 여러 면에서 감정이 넘치면서 불편하기도 했다. 사실 이창동 감독의 정서는 나의 것과 무척 다르다. 그에겐 뭔가 함축하려는 의도가 있는 반면에 나는 모든 것을 드러내고 폭발시키려 한다. 자라온 문화권도 다르지 않나. 이토록 다른 두 사람이 만났으니 불꽃 튀는 작업이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전 옷자락 한번 스칠 리 없었던 두 사람 사이에 <밀양>이라는 좌표가 끼어들었고 유난히 걸쭉한 뽕짝 분위기를 풍기는 <크리올료>가 그 주제곡으로 낙점됐다. 그렇다면 아르헨티나 이방인이 창조한 밀양의 대기는 어떤 느낌일까. 이한나 PD는 “바소가 100여곡을 작업했는데 그중 3곡 정도만이 사용될 예정”이라며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라 귀띔했다.
“이창동 감독의 특성은 집요함이다. (웃음) 작업시 하나하나 집요하게 따지는 편이고 어떤 부분은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개인적으로 그의 이야기에선 도교적 색채가 묻어난다고 생각한다. 어떤 개념을 설명하며 상충되는 표현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든 것을 표현하되 표현하지 말라든지. 영화음악에선 인위적으로 감정을 유발하려 하지 않는 편이다. 다른 요소와 조화를 이루되 절대 혼자만 드러나지 않는 그런 음악을 추구한다. 그의 신작 <밀양>은 매우 훌륭한 영화다. 현대적 윤리의 딜레마라고 할까, 그런 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현대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밀양>의 신애에게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이 그러하듯 바소는 나고 자란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 그가 지향하는 음악의 원천이 그곳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1989년부터 7년간 미국과 남미, 유럽 등지에서 베이시스트로 활발하게 활동한 록밴드 역시 라플라타강을 끼고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연상케 하듯 ‘항구’를 뜻하는 ‘라 포르투아리아’(La Portuaria)를 그 이름으로 삼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다. 이민자 수가 상당해 유럽적이면서 유럽적이지 않은 그런 묘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내 음악에서도 이민자들의 문화적 유산이 강하게 묻어난다. 세상에서 격리된 듯한 도시에서 생활하며 결국 바다에 대한 일종의 갈망을 키운 것 같다.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가고 결국은 바다가 되듯이 바다에는 고향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이 담겨 있다. 사실 나의 부모도 이탈리아 이민자 2세다. 아버지는 지금도 활동하는 재즈 뮤지션이어서 나는 태어나자마자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다. 16살 즈음에는 처음으로 재즈 콘서트에 참여했고 20살 때는 아르헨티나 록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찰리 가르시아 밴드에서 베이시스트로 활동했다. 그런 면에선 너무 이른 나이에 모든 음악인들이 꿈꾸는 자리에 오른 듯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