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레슬링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 복면 레슬러 만화는 어린이 잡지의 인기 메뉴 중 하나였다. 한 남자가 고아원 아이들을 돕고자 복면을 쓰고 레슬링 무대에 선다는 만화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데, 복면이 벗겨지면 레슬러는 이상하게도 힘을 잃거나 큰 수치심을 느끼곤 했다. 이런 만화에 영향을 준 것이 멕시코의 복면 레슬링을 일컫는 ‘루차 리브레’라는 사실, 그리고 낮에는 신부였다가 밤엔 고아를 위해 레슬러로 활동하는 멕시코 남자 이야기 등을 들은 건 한참 뒤의 일이다. 멕시코에서 국민적인 인기를 얻은 루차 리브레가 영화의 소재로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다. 그중에서 ‘산토’라는 인물이 (간혹 ‘푸른 악마’와 짝을 이뤄) 악당이나 괴물에 대항해 싸우는 영화는 수십편이나 제작됐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나쵸 리브레>는 <산토 시리즈>(사진1)의 팬을 자처하는 제레드 헤스가 만든 작품으로, 그는 원작에서 범죄스릴러와 판타지의 요소를 없앤 대신 그 자리를 착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코미디로 채워놓았다.
수도사 이그나쵸는 요리와 환자 심방 외엔 주어지는 일거리가 없는 수도원의 미운 오리다. 어린 시절부터 레슬링을 좋아한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거리에서 만난 소년 에스켈레토와 2인조 팀(사진2)을 이뤄 레슬러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러나 레슬링을 사악한 것으로 생각하는 수도원의 상황은 수도사인 그를 구속하고, 그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영웅 ‘람세스’처럼 뛰어난 프로 레슬러가 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마침내 인기와 명예보다 수도원의 고아들을 위해 레슬러의 길을 걷기로 한 그에게 사랑하는 수녀 엥카나시옹은 “남을 도우려고 싸운다면 주님의 축복이 있을 것이에요”라고 말해준다. <나쵸 리브레>는 헤스의 전작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와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무대가 미국의 아이다호에서 멕시코의 오하카로 바뀌었을 뿐, 어수룩하고 엉뚱한 시골 사람들이 어딘지 빈 듯한 행동과 대사를 풀어놓을 때면 영락없이 헤스표이며, 볼품없고 소외되었던 인물이 승리를 거두고 우리의 작은 영웅이 된다는 설정 또한 여전하다. 해프닝의 연속인 헤스의 영화에 대부분은 혀를 찰 테고,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에 비해 의외의 순간이 적은데다 의도된 장면이 쉽게 눈에 띄어 재미가 덜하지만, 요즘 할리우드영화 중에 그의 영화만큼 진실로 따뜻한 심성과 소박한 감동을 안겨주는 작품을 보지 못했다. 정말이다. 헤스의 영화가 매번 한국 극장에서 제대로 개봉되지 못한 채 DVD로 직행하는 현실이 아쉬울 따름이다. 인디영화였던 전작에 비해 훨씬 많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나쵸 리브레>가 자국에선 그런대로 짭짤한 흥행수익을 올렸음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나쵸 리브레> DVD는 ‘그림 같다’는 말이 아깝지 않은 목가적인 영상(사진4)과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대니 엘프먼의 음악을 즐기기에 충분하다. 감독, 작가와 주연을 맡은 잭 블랙이 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진행하는 음성해설에선 친숙한 사람끼리의 농담과 숨겨진 영화 이야기들이 쉴새없이 흘러나온다. 한번이라도 잭 블랙의 음성해설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의 음성해설이 그의 연기를 보는 것에 필적하는 즐거움이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특집영상(56분, 사진3)은 5부- 촬영 뒷이야기, 마스크를 벗은 잭 블랙, 루차 리브레, 멕시코 현지 제작, 즉흥 인터뷰- 로 나뉘어 진행된다. 카메라 뒤에서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잭 블랙의 모습이야 익히 짐작되겠고, 멕시코 복면 레슬링에 대한 소개가 볼 만하다. 그 외에 노래하는 잭 블랙의 모습(6분), 3개의 삭제장면(10분, 사진5), 포토 갤러리, 홍보영상, 그리고 이스터 에그(사진6)가 부록으로 제공된다. 강력 추천하는 DVD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