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소식]
[포커스] 사회적 저항 혹은 내면적 망명의 목소리
2007-04-26
글 : 임안자 (전주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일마즈 귀니부터 누리 빌게 세일란까지, 터키영화의 숨은 걸작들
터키 내 쿠르드족 문제를 처음으로 거론한 영화, 일마즈 귀니 감독의 <양떼>

터키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곳이다. 중세 오스만 제국시대부터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가 공존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지리적 조건 때문이다. 그러나 1920년대 초 터키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투르크 계통의 전통문화가 주도권을 갖게 되며 더불어 서구문화의 일방적인 흡수현상이 일어난다. 서구와 가까운 이스탄불이 터키영화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게 된 것도 정부의 문화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쿠르드 민족은 자주성을 잃게 되고 이들의 언어 또한 공식 언어로서의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결코 짧다고 볼 수 없는 터키 영화사에서 터키 내 쿠르드족 문제를 처음으로 거론한 영화는 일마즈 귀니 감독의 <양떼>였다. 이미 1960년대에 터키영화계의 최고스타로 인기 절정에 이르렀던 일마즈 귀니는 본디 쿠르드족 출신이었는데 오랫동안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숨겨왔던 그는 <희망>을 연출하면서 비로소 쿠르드족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양떼>는 그가 감옥에서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뛰어난 서사극이다. 귀니 감독은 <양떼>를 발표한 10년 뒤 감옥에서 쓴 시나리오에 기초한 작품인 <욜>로 칸영화제 대상을 수상하였는데 각각의 작품을 (옥중의 귀니를 대신해) 연출한 제키 왹텐과 세리프 괴렌은 귀니의 작품의도와 형식미를 충실히 계승한 그의 제자들이다.

쿠르드족 문제는 1984년 귀니 감독이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죽은 뒤 한동안 묻혀 있다가 1999년 여성감독 예심 우스타오글루의 국제적 성공작인 <태양으로의 여행>을 통해 다시 표면화되었다. 이 작품은 베를린 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터키정부는 이 영화에 대한 감시의 시선을 늦추지 않았다. 일례로 터키정부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태양으로의 여행>을 프로그램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청했는가 하면 터키영화 회고전에 맞춰 발간될 책자에 실린 글 가운데 이 작품에 대해 잘못되게 서술한 글이 있으니 삭제하거나 수정해 달라는 등 압력을 넣기도 했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8편 가운데 3편이 쿠르드족의 삶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임을 고려하면 터키정부의 민감한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1960년, 1971년, 그리고 1980년 세 차례에 걸쳐 군부 쿠데타를 겪은 나라인 터키에서 검열문제는 뿌리 깊은 것이다.

외메르 뤼트피 아카드의 <신부>
외메르 카부르의 <마더랜드 호텔>

터키영화에서 적지 않게 다루어지는 주제는 이주 내지는 망명으로 따라서 전주국제영화제의 상영작 대부분이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양떼>는 쿠르드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아나톨리아 동부지역의 한 가족이 기업가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앙카라로 떠나게 된다는 이야기이며, <태양으로의 여행>에서 터키출신의 젊은이는 검은 피부 때문에 쿠르드인으로 취급을 당하자 죽은 쿠르드족 친구의 고향을 향해 떠난다. 외메르 뤼트피 아카드의 <신부>는 아나톨리아의 농촌을 떠나 이스탄불에 정착한 한 가족의 치열한 생존투쟁을 다루면서 1970년대의 농촌인구의 도시유입문제에 초점을 맞췄고, 현대화의 바람에 사라져가는 농촌의 전원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누리 빌게 세일란의 <작은 마을>은 시골 젊은이들의 실업문제와 도시로의 탈출을 암시한다. 터키 최고의 컬트영화 감독 외메르 카부르는 <마더랜드 호텔>에서 호텔 내부만을 맴돌며 자기 내면으로의 망명을 택하는 주인공의 비극적 삶을 묘사하고 있다. 내면으로의 망명은 군부시절의 많은 지식인들이 택한 우회적인 저항의 형태였다.

여러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들어서 터키영화는 빠르게 변화하며 새로운 부흥기를 맞고 있는 듯하다. 먼저 자국영화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2003년에 34%였던 것이 2005년에는 60%에 이르렀고 지난 몇 년 동안에는 할리우드 영화의 인기를 압도한 영화들도 적잖이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주제의 선택이 갈수록 다양화되고 있음은 고무적이다. 터키 정부는 일찍이 이슬람교로부터의 분리 정책을 고수해왔던지라 터키영화에서 이슬람을 주제로 삼은 영화는 흔치 않았는데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타크바>는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는 예외적인 작품이었다. 최근의 터키영화계에서는 정부의 지원에 힘입은 젊은 감독들의 작품 활동이 전례 없이 활성화 되고 있으며 EU가입을 앞두고 있음을 고려하면 터키 정부가 그간 고수해 온 강경정책에도 한계가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