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멘젤의 1968년작 <줄 위의 종달새>는 새로운 사회의 이상에 어울리도록 재교육이 필요한 사람들이 모인 폐철처리장 주변에 카메라를 가져간 영화다. 그럼으로써 이른바 ‘노동자들의 천국’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이 영화를 두고, 피터 헤임즈가 쓴 <체코 뉴웨이브>라는 책은 “대면할 수 없는 상황과 대면하는 것”에 대한 영화라고 적절하게 표현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같은 ‘대면’이 꼿꼿이 정색한 태도로 이뤄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을 일컬어 ‘코미디를 배운 자’라고 말하는 영화감독 멘젤은, 여기서 보듯 삶의 잔인함과 슬픔에 대해 차라리 웃음으로 대응하자고, 그래서 삶과 화해할 방법을 찾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어떤 이들은 멘젤의 코미디 영화에서 버스터 키튼의 잔영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또 멘젤의 어떤 영화는 그 스스로가 루피노 레인이나 찰리 채플린을 직접 언급할 때도 있다. 아마도 멘젤이 앞서 언급한 코미디의 대가들로부터 모종의 영향을 받긴 했겠지만 비교하자면 그의 코미디라는 것은 어떤 격한 파열음을 발하는 쪽은 아니다. 그는 부산떨지 않고 느긋하기까지 한 발걸음으로 만들어낸 코미디 안에다 서정과 성찰을 모두 담으려 하는 영화감독으로 봐야 할 것이다. 멘젤이 채택하는 이와 같은 영화 구축의 방식은 어쩌면 삶에서 그가 특별히 찬양하는 가치를 담기에 아주 적절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멘젤이 시간을 맘대로 가지며 쓸 수 있는 방탕함을 나쁘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영화감독임을 언급해야 한다. 요컨대, 멘젤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많은 모더니스트 영화감독들이 텅 빈 시간의 진공상태에 짓눌림을 느꼈다면 멘젤은 반대로 어쩔 수 없이 다소 노스탤지어가 깃든 시선으로 향유할 시간을 마음껏 갖는 것에 대한 갈망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리고 <가까이서 본 기차>나 <줄 위의 종달새> 같은 영화들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그는 시간의 임의적이고 자유로운 활용으로부터 권위에 대해 순응하지 않을 수 있는 태도의 가능성을 본다.
나태해질 수 있을 때 또는 어떻게든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낼 때, 멘젤 영화의 인물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성적 욕구를 채우려는 방향으로 향해간다. 그들에게 에로틱한 유혹은 기꺼이 굴복을 감수해야만 할 어떤 것이다. 그리고 멘젤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서 구현되는 생에 대한 긍정의 정신과 자유에 대한 갈망, 그리고 권위의 무게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가능성 등을 끄집어낸다. <가까이서 본 기차>에서 예를 들어보자면, 그토록 성숙한 ‘남자’가 되고자 했던 밀로시는 결국 그 소원을 이뤘을 때 단지 한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서도 거듭나고 성의 즐거움을 누리는 그의 상사 후비츠카는 그 같은 자신의 기질로 인해 권위를 조롱하고야 만다.
물론 멘젤의 영화에서 성적인 갈구가 사람들을 항상 평탄하거나 매끈한 쪽의 길로 데려가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마을에 들어온 아리따운 여자 곡예사에게 접근했다가 낭패를 본 <거지의 오페라>(1968)의 세 중년 남자들은 반대의 경우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성적 욕망으로부터 결국에 난처함을 맛보게 된 것은 아마도 그들이 가진 위선적 허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물론 멘젤의 이와 같은 태도는 비단 이 영화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영화에서는 굳이 편을 나눈다면 사악한 쪽에 속하는 인물도 혹은 억압자의 위치에 선 사람도 다소 어리석어 보이기는 할지언정 통상적으로 ‘악한’이라고 표현할 유형의 인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로부터 우리는 멘젤이라는 인물이, 장 르누아르가 대표자가 되는 일군의 영화감독들, 즉 무엇보다도 ‘인간’을 그리는 것을 중요시하는 휴머니스트 영화감독들에 속한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그럼에도 역시 멘젤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끈 인물들은 억압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보다는 그 영향 아래에 있는 사람들 쪽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엄격한 의미의 영웅도 아니고 악한은 더더욱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다. 멘젤은 그런 이들을 찬양하는데, 아마도 그건 그들로부터 그가 본성에 보다 가깝다고 생각하는 자질들을 동원해 험한 세파를 견뎌내고 살아남는다는 것의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는 이들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