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사카린 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애정만세>
2001-10-17

‘오늘은 기필코 한놈 건져 보리라.’ 2001년 9월 어느날, 집에 들어서자마자 황급히 컴퓨터를 켠다. 채팅사이트가 뜨자, 밀려들던 졸음이 후딱 달아나버린다. 먼저 ‘지역’과 ‘나이’를 입력한다. 경기, 30.

다음은 닉네임을 정하는 순서. 머뭇거린다. 머리 속에서 온갖 단어들이 다툰다. 먼저 ‘파졸리니’가 떠오른다. 안 돼, 이 닉을 썼다간 어제처럼 파리 날리기 십상이지. 탁탁탁탁…. 손끝으로 자판을 퉁기며 자못 심사숙고에 빠져든다. 순수사랑? 쪽팔려, 지금 바로? 너무 노골적이야. 아… 나를 살짝 드러내면서 넘들에게 어필할 이름은 정녕 없는 걸까? 비탄에 빠질 무렵, 구원처럼 떠오르는 네 글자, 애.정.만.세. 유레카! 그래. 차이밍량을 아는 놈이라면 채팅시간을 허비해도 아깝지 않지. 설령 그 영화를 몰라도 날 “사랑밖에 난 몰라”쯤으로 오해할 거 아냐? 애인 구하는 사이트에서는 딱이야. 양날의 칼이라구. 오케이! Enter.

재빨리 대화자의 닉을 일별한다. 애정만세가 눈에 띈다. 내 닉이군. 스친다. 일단 눈에 확 들어오는 닉 없음. 다시 꼼꼼히 닉을 살핀다. 애정만세, 서울, 28. 어? 나말고도 애정만세가 있었네? 아, 이건 신의 계시야. 섣부른 확신에 찬 손가락이 서둔다. ‘닉이 똑같네요.’ 쪽지가 날라가고 곧바로 1대1 대화방이 만들어진다.

애정만세: 차이밍량 좋아하시나봐요. 애정만세: 네.

애정만세: 애정만세 주인공 이름 기억 나세요? 애정만세: 여자는 메이였는데….

애정만세: 남자는 시아오강 하고 아정. 애정만세: 어떤 장면이 젤 기억에 남아요? 애정만세: ….

시시껄렁한 대화가 이어진다. 아무리 질문 세례를 퍼부어도 ‘놈’의 대구는 ‘네’와 ‘글쵸’ 사이만을 오락가락한다. ‘아닌가 보군….’ 이른 체념과 함께 ‘애정만세’를 내 인생의 영화로 만든 그때 그놈에 대한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20대 중반의 내가 ‘평생 다시 없을 사랑’이라고 호언장담케 만들었던 놈. 으르고 구슬리고 애원하고 협박까지 했으나 끝끝내 나를 거절했던 놈. <애정만세>를 보러 가자고 약속해 놓고 바람맞힌 놈. 95년 가을 어느날, 난 충분히 쓸쓸해질 준비를 하고 극장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어떤 침묵은 처절한 비명이란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부동산업자 메이, 길에서 옷을 파는 아정, 납골당을 파는 시아오강. 마음 둘 곳 없는 청춘들은 낮에는 타이베이 거리를, 밤에는 빈집을 떠돈다. 무엇보다 시아오강을 잊을 수 없다. 메이와 아정이 정사를 나누는 텅 빈 아파트의 침대 밑에서 숨죽여 흐느끼던 시아오강. 끝내 아정을 향한 시아오강의 마음은 ‘말하지 못한 내 사랑’으로 남았다. 그리고 내내 먹먹했던 가슴에 마지막 카운터 블로, 롱테이크가 찾아왔다. 메이는 공원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메이의 어깨처럼 내 어깨도 주체하지 못하고 들썩이고 있었다.

애정만세를 부르지 못하고, 20대 후반의 봄날이 갔다. 물론 그놈도 잊혀졌다. 잊고 나니, 그 시절의 ‘오버’가 더없이 민망해졌다. 그리고 올 여름 간만에 또다른 놈에게 매혹당했다. 어느새 서른살이었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 깔았네’(최승자 ‘삼십세) 그놈을 괴롭히는 나의 슬로건이었다. 결국 최후 통고가 날아들었고, 그날 혼자서 <봄날은 간다>를 보러 갔다. 한바탕 통곡을 해보겠다는 심사였다. 영화비가 아깝지 않을 만큼.

가끔씩 코끝이 시큰해지기는 했으나, 끝내 울음은 터지질 않았다. 오히려 상우가 심각해질 때마다 키득키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한껏 애처로운 눈길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대사를 읊을 땐 “얌마,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라고 면박을 주고 싶을 정도였다. 도통 순정에 몰입하지 못하는 내가 기특하고도 징그러워졌다. 집에 돌아와 허수경의 시, ‘봄날은 간다’를 다시 읽었다.

‘사카린 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안타까움보다 더 광포한 세월아//순교의 순정아/ 나 이제 시시껄렁으로 가려고 하네/ 시시껄렁이 나를 먹여 살릴 때까지.’

철판 깐 얼굴에, 시시껄렁의 나날에, 애정만세의 몰입이 다시 찾아올까? 설마.

글: 신윤동욱/ 한겨레21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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