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영화]
오래된 죽음과 새로운 부활에 관한 명상 <귀뚜라미>
2007-05-02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귀뚜라미> Crickets
아오야마 신지/일본/2006년/102분/시네마스케이프-마스터즈

17세기에 선교활동을 위해 일본에 왔다가 박해 받고 사형당한 포르투갈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어느 나직한 음성이 들려준다. 이 영화가 혹시 일본에서 있었던 카톨릭 선교와 박해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나 우리는 잠시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아오야마 신지의 <귀뚜라미>는 엔도 슈사쿠의 <침묵>과 같은 종교적 이야기가 아니다.

말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노년의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미모의 젊은 여자가 주인공이다. “그를 알게 된 지 반년이 지났다. 나 없이 살 수 없는 남자를 드디어 만났다”며 즐거워하는 여자. 둘은 말없이 걷고, 밥을 먹고, 볕을 쬔다. 여자의 말처럼 노인은 모든 걸 여자에게 기대고 있다. 그는 거의 엄마를 따라다니는 아이 같다. 반면에 여자는 노인의 음푹 패어 텅 비어 있는 눈동자와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입술에 설명 못할 성적 매력을 느낀다. 노인은 음산하기 이를 데 없으며 한편으론 어떤 마력까지 지니고 있어 보인다. 그런데 얼핏 이해하기 힘든 이들의 절대사랑에도 갑자기 균열이 생긴다. 여자는 종종 시장을 봐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항구의 술집에서 술을 마신다. 어느 날 술집에 있던 젊은 미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려고 나선다. 그가 움켜잡았던 여자의 손에서 노인은 다른 남자의 체취를 맡은 뒤 모든 걸 포기하고 죽고 싶어 한다. 그 뒤로 펼쳐지는 설명 못할 촌극과 환상들. 이쯤 되면 이 영화가 사랑의 갈등이 아니라 오래된 죽음과 새로운 부활에 관한 명상을 다루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오야마 신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이상한 애정싸움과 그로 인해 빚어진 죽음에의 의지를 과거의 순교와 은근히 연관시킨다. 일상은 점차 환상으로 뒤바뀌고 무심코 기적이 일어난다. 매우 모호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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