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 리뷰]
베르사유의 인형놀이, <마리 앙투아네트> 첫 공개
2007-05-08
글 : 김도훈

일시 5월7일 오후2시

장소 하이퍼텍 나다

이 영화
1770년, 14살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략결혼을 위해 조국 오스트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온다. 하지만 그녀보다 겨우 한살이 많은 남편 루이 16세는 도무지 앙투아네트에게는 관심 조차 두지 않고 취미인 열쇠 만들기에만 매진할 뿐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조국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꼭 2세를 생산해야한다며 앙투아네트를 부추기지만 어설픈 소녀의 유혹에 무딘 소년이 넘어갈리 없는 일. 그래서 소녀는 결심한다. 남편과 조국의 부운은 자신과 상관없노라고. 차라리 누릴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모조리 즐기며 살아가겠노라고. 그리고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베르사유의 파티가 시작된다.

100자평

<마리 앙투아네트>는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전작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 이어 여시 이국적인 것에 둘러싸인 신참자의 이야기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꼬맹이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부르봉가의 왕자비가 되는 날 “오스트리아 물건은 하나도 몸에 걸쳐선 안 된다”는 관례에 따라 낯선 이들 앞에서 발가벗겨진다. 무방비한 소녀의 나신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이 숏은 영화 전체의 요약이나 다름없다. 철도 없지만 악의도 없었던 앙투아네트의 삶은 점점 헝클어져간다.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역사적 비극도 아니고 사랑받지 못한 여자의 비극도 아니라, 제대로 된 관심과 보살핌을 받지 못한 10대의 비극이다. 그녀가 겨우 강해지고 철이 들 무렵 이야기는 종지부를 찍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피아 코폴라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심리를 파고드는 건 아니다. 서사극이 아니라 실내극의 문법을 따른 이 영화는 그냥 ‘베르사유’라는 인형의 집에서 무료한 놀이를 벌이다가 갑작스런 현실의 노크 소리를 듣는 여자를 보여준다.
김혜리/ 씨네21

역사의 한 장을 베어 소통의 리트머스로 사용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베르사이유는 자문자답의 철조망이다. 프리프리아농의 잔디밭에서 파티를 가지며 마리 앙투아네트가 내뱉은 한 마디. “나는 여기에 있나요?” 소피아 코폴라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 확대경을 놓고 길 잃은 양 한마리를 찾는다. 오프닝과 함께 돌연 터져나온 록음악이나, 풀밭과 궁전을 맴도는 몽환적인 분위기는 그 미로를 설명하는 혼란이다. 다만 영화를 채색하는 모던한 질감의 요소들이 역사를, 나아가 영화를 자꾸 ‘소피아 코폴라적’으로 부풀리려 한다는 의심은 풀기 어렵다.
정재혁/ 씨네21

형형색색의 구두 사이에 수줍게 놓인 컨버스 운동화를 카메라가 비추는 순간, 이건 혹시 18세기를 배경으로 한 린제이 로한의 전기영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긴 18세기의 베르사유와 21세기의 할리우드가 뭐 그리 다를게 있었겠나. 소피아 코플라는 가끔 영화감독이라기 보다는 패션 디자이너의 손길로 베르사유의 삶을 재단하지만, 영화는 결코 2시간짜리 오뜨-꾸뛰르 광고로 전락하지 않는다. 얄팍하고 달콤한 것들의 아름다움으로 과도하게 넘치는, 그러나 스스로의 과도함을 잘 알고 있는 작가의 영화다.
주의: 한국어 자막이 과하다. ‘대략 난감’같은 통신체 의역은 불필요한 영화이며, 말장난에 집중 하느라 필요한 정보를 놓치고 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식이면 대략 난감하다.
김도훈/<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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