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사이] 21세기에 도래한 신파 뉴웨이브
2007-05-11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熱] 관객의 손수건보다 주인공의 일상에 더 기꺼이 반응하는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갖다 붙이자면 ‘토끼굴’ 장르에 속하는 영화들이 있다. 좁은 굴 속에 토끼를 몰아넣고 연기를 피워 질식시키는 토끼 사냥식의 이야기를 가진 영화들이다. 토끼 사냥과 토끼굴 영화들의 다른 점은 사냥에서 토끼는 연기에 질식해 굴을 뛰쳐나오는 시나리오지만 영화에서 토끼는 굴의 구석을 점점 더 파고들어가다가 결국 그 안에서 죽는다. 비극적 죽음이라는 점에서 엔딩은 같다.

토끼굴 영화의 대표작이라면 나는 단연 <어둠 속의 댄서>를 꼽겠다. 2000년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이 장르 최고의 작품임을 인정받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 셀마의 인생은 구석으로 몰리고 몰리고 또 몰린다. 더이상 굴을 파고들어갈 손톱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죽는다. 그것도 사형당한다. 그것도 살인 누명을 쓰고. 밀려오는 연기로 질식하는 와중에 그녀는 마치 순교자처럼 자신의 것을 포기한다. 멀어져가는 눈과 평생 모은 돈과 결국에는 목숨까지.

그리고 7년이 흘러 셀마에 필적할 순교자적 인물이 강림했으니 ‘혐오스런’ 마츠코다. 마츠코가 얼마나 재수없고, 남자복이 지지리 없으며, 또 심지어 그녀의 선택 또한 어쩌면 그렇게 삽질스러운지는 여러 리뷰들이 잘 알려줬기에 여기서 더 쓸 필요는 없겠다. 어쨌든 그녀도 일 버려, 돈 버려, 몸 버려, 마음 버렸다가 결국 죽임을 당한다. 그것도 철없는 꼬마들의 장난 같은 폭력으로. 그렇게 죽은 그녀의 머리 뒤로 영화는 후광을 씌운다. 웃자는 거지?

웃자는 거 맞다. 여기서 토끼굴 제1범주와 제2범주가 갈린다. 전자가 <어둠 속의 댄서>라면 후자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가 창시했다. 이 두 가지 하위장르를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한 가지만 꼽자면 ‘토끼몰이’의 적용범위다. <어둠 속의 댄서>는 주인공 인물과 관객 양쪽에게 쌍끌이식으로 운영한다. 셀마가 겪는 인생의 혹독한 시험이 단계를 올려갈수록 관객도 ‘어때, 불쌍하지?’에서 ‘이래도 안 울어? 니가 인간이야?’까지 압박의 단계 상승을 경험한다. 셀마가 교수대에 오를 때에는 그 압박감이 너무 심해 거의 온몸을 두들겨 맞는 듯한 기분까지 든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영화보다 주연배우 비욕의 그 유명한 파파라치 폭행사건이고 내가 비욕으로부터 두들겨 맞던 그 여기자가 된 것 같다.

주인공의 신파성과 파국으로 달려가는 이야기의 그 과감한 보폭으로 따지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어둠 속의 댄서>에 못지않다. 그런데 이 영화는 관객을 압박하지 않는다. 도리어 ‘지금쯤 울어야 할 타이밍이 아닐까’ 싶을 때 ‘릴렉스~릴렉스~’를 외친다. 신파적 표현의 궁극이라고 할 만한 동반자살 기도 장면에서 상대 남자는 입에 들어 있는 수십개의 알약들을 질질 흘리며 “무서워서 못 죽겠어”라고 말하고, 비참하게 망가져서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던 50대의 마츠코는 텔레비전 속 아이돌 그룹에 벼락처럼 꽂혀 책 한권 분량의 팬레터를 신나게 쓴다. 또 마츠코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포르노 배우 친구는 죽은 마츠코의 유품들을 수습하던 조카 쇼에게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최신 출연작 3종 세트를 선물한다. 웃다보면 어느새 후광을 배경으로 한 마츠코가 마치 천국의 아버지와 재회하러가는 예수님처럼 계단을 끝없이 올라간다. ‘이 계단, 길어도 너무 긴 거 아냐?’라는 반감이 살짝 들 때쯤 가슴속에 뭔가 뭉클한 게 느껴진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비브르 사 비>(그녀의 삶을 살다)잖아.

왜 꼬이는 인생이라고 삶의 즐거운 순간과 한심스러운 순간과 어처구니없는 순간과 웃기는 순간이 없겠는가. 왜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안 짓고,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지 않겠는가. <어둠 속의 댄서> 같은 지금까지의 토끼굴 영화들은 내용상의 희생뿐 아니라 눈물을 짜내기 위해 캐릭터의 희생(텔레비전 안 본다! 바보 같은 표정 안 짓는다! 아마 똥도 안 눌걸?)을 동반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손수건을 든 관객에게 아첨하기보다 자신의 캐릭터를 아끼는 마음으로 돌본다. 이것만으로도 ‘21세기에 도래한 신파의 신파(뉴웨이브)’라고 이름 붙일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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