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3>가 춘궁기에 허덕이던 극장가의 구세주가 되고 있다. 흔히 말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힘이겠으나 <스파이더맨 3>가 스펙터클만 요란한 영화는 아니다. 2편만큼 훌륭하진 않지만 3편 역시 시리즈 특유의 개성은 살아 있다. 이웃집 소년 같은 피터 파커의 성장담인 <스파이더 맨> 시리즈는 각각 주제를 함축하는 대사를 갖고 있다. 평범한 젊은이가 슈퍼히어로가 되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인 1편은 전체 시리즈를 관통하는 선언이 나온다. “막강한 힘에는 막대한 책임감이 따른다.” 슈퍼히어로의 사랑과 고난에 관한 이야기인 2편에선 메리 제인의 대사를 들 수 있다. “난 늘 너의 문 앞에 있었어. 누군가 널 구할 때도 있어야 되지 않겠니?” 슈퍼히어로도 외롭고 힘들며 돌봐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3편도 이런 식으로 규정짓자면 용서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벤 아저씨는 우리가 가슴속에 복수심을 품고 살아가길 원하진 않았을 게다. 복수심은 독약 같아서 우릴 갉아먹고 우릴 흉측하게 만든단다.” 메이 숙모의 말씀대로 피터는 복수를 하는 것보다 용서를 하는 것이 나은 선택임을 깨닫는다. 무척 단순한 얘기지만 <스파이더맨 3>가 생각만큼 단순한 영화는 아니다. 나는 <스파이더맨 3>가 ‘용서’라는 주제를 통해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일종의 선전영화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스파이더맨 3>에서 스파이더 맨이 성조기를 배경으로 날아가는 장면을 놓고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미국 만세”를 외치는 것 같아 불쾌하다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나는 제작진이 이 장면을 넣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스파이더 맨과 미국을 동일시하라는 주문이지만 미국이 슈퍼국가라는 걸 자랑하기 위한 장면은 아니다. 검은 옷을 입고 복수심에 불타올랐던 스파이더 맨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으로 본다면 <스파이더맨 3>는 이제 전쟁을 그만두고 용서의 제스처를 취하자는 호소로 읽힌다. 벤 아저씨와 메이 숙모로 대표되는 선한 부모가 미국의 본모습이며 피터 역시 그들의 가르침을 잘 따랐는데 외계의 이물질로 본성을 잃게 됐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3편의 악당 샌드맨이 중동의 모래바람을 연상시키는 것도 단순한 우연으로 보이진 않는다. 영화는 피터가 검은 옷을 벗고 잃었던 자신을 되찾는 과정을 보여주며 착하고 건강한 미국에 대한 자긍심을 드러낸다. “널 믿는다. 피터”라는 메이 숙모의 대사는 미국 국민을 향한 <스파이더 맨> 제작진의 당부로 들린다. 그러면서 영화는 반부시 캠페인이 되고자 한다. 영화 초반 “한 사람의 힘으로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라고”라고 말하는 장면을 기억한다면 “선택이 우리를 만든다”는 마지막 대사가 달리 들릴 것이다. <스파이더맨 3>의 ‘용서’는 다음엔 결코 부시와 공화당, 그리고 복수를 위한 전쟁을 선택하지 말자는 다짐이다.
물론 <스파이더맨 3>가 원수를 용서하라는 교훈만 되뇌고 있는 건 아니다. 3편은 청혼반지를 지키려는 액션장면이 보여주듯 무엇보다 결혼 프러포즈를 앞둔 젊은이의 고군분투기다. 여기서 스파이더 맨과 대적하는 악당들은 청혼을 앞둔 피터의 불안과 공포를 대신한다. 리비도의 분출을 촉진하는 검은 이물질, 정규직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에디, 재력에 걸맞은 정신적 여유를 보여주는 해리 등은 성인이 되기 위해 피터가 대면해야 할 현실을 보여준다. 멋대로 날뛰는 남성 호르몬을 잘 다스려야 하며 가족을 부양할 능력과 상대에 대한 배려심을 갖춰야 한다는 결론은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보통 젊은이 누구에게나 통하는 교훈들이다. 슈퍼히어로영화를 평범한 젊은이의 성장 이야기로 다룬다는 시리즈의 매력은 이렇게 계속된다. 언제나 “너의 문 앞에 있었다”고 말했던 메리 제인을 맞기 위해 피터가 할 일(한 일???)은 현관문 손잡이를 제대로 고쳐놓은 것임을 잊지 말자. 3편의 액션은 어떤 면에서 피터가 현관문 손잡이를 고치기 위해, 또는 청혼반지를 건네기 위해 벌인 소동이다. <스파이더맨 3>는 단순하지만 그래도 풋풋한 청춘영화이며 투박하지만 그래도 긴급한 좌파 선전물이다.
p.s. 김현정 기자가 지금까지와 다른 전망을 찾아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장국영을 좋아했고 책과 리본을 사랑했으며 좋은 글을 많이 썼던 후배가 앞으로 더 밝고 건강해지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