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3부작 DVD 출시를 앞두고 미국의 영화평론가 리처드 페냐로부터 이 시리즈에 대한 글을 받았다. 개봉 당시 개별 영화에 대한 비평은 많이 제출되었으나 이렇게 3부작을 다시 돌아볼 기회는 별로 없었기에 의미있는 자리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편집자
지금까지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이 적어도 서구에서 덜 인정받은 이유는, 모든 것을 자꾸만 범주화하려는 경향으로부터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비평적 덫과 상당 부분 관련이 있다. 심지어 박찬욱 감독의 진정한 예찬론자인 쿠엔틴 타란티노도 칸영화제에서 <올드보이>를 언급하면서 박찬욱 감독을 “위대한 장르 감독”이라고 표현해 이 같은 덫의 희생양이 되었다. 위대한 장르 감독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박찬욱이 작업하는 장르란 과연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박찬욱의 장르를 설명하기 위해 야쿠자영화에서부터 현대 일본과 한국의 공포영화까지 모두 아우르는 ‘폭력 장르’라는 개념을 인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불분명한 범주화가 어떠한 통찰력을 제시해줄 수 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박찬욱의 영화들은 분명 폭력적이지만 그 자체로서의 단순한 스펙터클이 아닌 폭력에 대한 숙고를 다루고 있다. 박찬욱을 단지 “장르 감독”으로 규정짓는다면, 그의 영화들이 지닌 탁월함을 진정으로 인정할지도 모를 관객에게서 그를 멀어지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박찬욱의 영화들은 서구에서 생각하는 “예술영화”로는 보이지가 않는다. 또 어떠한 내용이나 방식으로 만들어졌든지 간에 자막영화라는 이유로 (미국에서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 예술영화전용관 체인으로 분류되어 상영된다는 점은 그의 작품들을 문화적 변방에 머무르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박찬욱의 영화들은 흥미 위주의 자극을 원하는 관객에게는 너무 지적이고, 지적인 자극을 원하는 관객에게는 너무나 본능적이다.
박찬욱의 폭력에는 타인과의 관계가 내재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복수 3부작’에서의 폭력은 현대사회 속 개인의 문제점들에 대한 박찬욱의 접근법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한계점이다. 폭력은 한 개인의 의지를 통제 또는 제한하려는 모든 규범과 관습에 대항하는 확고한 주장이 된다. 박찬욱 영화에서 다른 이에 대한 폭력 행위나 그에 대한 동의는 고의적인 경계 넘기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가장 파괴적인 부분인 결말. 즉, 백 선생에게 살해당한 아이들의 부모가 복수하는 장면에서 가장 훌륭하게 드러난다. 박찬욱 영화에서의 그 수많은 폭력신들에도 불구하고 폭력이 영화적인 무희나 추상적인 의식행위처럼 당연시되어 표현된 적은 한번도 없다. 대신 박찬욱은 폭력에 대한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긴 여정을 표면에 내세운다.
형식적인 면에서 본다면 박찬욱은 인지적 혼미함을 강조하는 현대영화의 한 경향에 속하고 있다(데이비드 린치와 라스 본 트리에가 같은 경향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만약 그의 작품에 어떤 전형적인 형식성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충격 컷(shock cut)일 것이다. 박찬욱은 절대로 내러티브의 연속성이 그의 놀랍고도 충격적인 예상 밖의 이미지들을 중단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새로운 캐릭터들이 소개되고, 새로운 장소가 공개되며, 새로운 시점이 생겨나는 이 모든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한 발자국 물러서서 재구성하도록 만든다. 박찬욱의 영화는 숏들과 신들을 연결해 점점 더 큰 단위의 조직화된 실체로 발전시키는 일 대신 관객을 끊임없이 내러티브 밖으로 끌어내면서 고전적 개념의 연속성 외의 것으로부터 만들어진다.
박찬욱의 영화들에는 동시대의 영화들과는 비교되는 물리성이 존재한다. 박찬욱의 영화를 보는 이들은 보이는 것 혹은 그 이상의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같은 의미에서 박찬욱은 에이젠슈테인의 현대적 계승자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이는 두 감독이 영화의 단순한 결말(대부분의 감독들은 여기에서 멈추지만)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고 관객을 더욱 깊숙한 인지적 단계까지 끌어들인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현대적 계승자
나는 세편의 ‘복수 3부작’이 하나의 세트로 출시된다는 소식이 무척 반갑다. 최근 다시 그 작품들을 접할 행복을 누리면서 각각의 영화들이 어떻게 상호 연결되고 반복되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정말 매혹적인 일이었다. 비록 박찬욱은 함께 읽었던 그의 인터뷰들과 서로 나눈 짧은 대화에서 “세편이 표면적으로만 모두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는 나의 주장을 회피했지만, 나는 ‘복수 3부작’들이 연속되며 진화하는 같은 주제의 시리즈로서 <친절한 금자씨>에 이르러서야 가장 정점에 이르는 아름다운 실현을 이루었다고 보았다.
나는 <친절한 금자씨>를, 어설픈 인터넷 블로거들이 칭하는 것처럼 단순한 <올드 걸>식 영화의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 지금까지의 박찬욱 영화들 중 최고 걸작이라고 보고 있다. <친절한 금자씨>는 (의심의 여지없이 지난 10년간 최고의 명연 중 하나였던) 이영애의 멋진 퍼포먼스에 엄청난 힘을 받았으며, 박찬욱은 관객을 이끌고 복수에 대한 심리적, 물리적 그리고 도덕적 잣대까지의 전반적인 부분들을 관통해가면서도, 전편들과는 달리 마치 금자가 모든 과정을 다 겪은 뒤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들을 통과해나온 것과 같은 일종의 구원으로 결말을 맺고 있다. 나는 이것이 일부 관객을, 심지어 박찬욱의 대단한 예찬론자들까지도 불편하게 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친절한 금자씨>의 결말은 굉장히 다중적이다. 결말에 제시된 재구성된 가족이 생존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더욱 불안하게 하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받아 먹으려는 듯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다. 이것은 상징적이거나 혹은 로마 정교회에서는 신체적인, 신자와 예수의 결합을 기념하기 위한 기독교 성사에서의 성찬식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금자에게는 종교적인 교감도 구원이나 초월도 없다. 그녀는 백색의 케이크에 얼굴을 묻는다. 이는 절망이 묻어나는 순간이다. 카메라가 금자와 다른 이들의 뒤로 빠지면서, 우리는 구원이라기보다는 신이 그의 창조물들을 그들의 잔혹한 의지에 맡겨두는 식으로 버리게 됨을 목격하게 된다.
하나의 단위로서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인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는 새로운 세기가 시작한 이래 가장 인상적으로 만들어진 시리즈임이 분명하다. 형식적으로도 탁월하고 흠잡을 데 없이 세공된, 끝도 없이 도발적인 이 세편의 영화들은 내가 이름 댈 수 있는 최근의 어떤 영화들보다도 더 영화가 생명력 있는 매체로 향후 수년간 남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