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웃는다. 입술을 옆으로 벌리며, 헤벌쭉. 뜯어먹다만 어린 옥수수처럼 듬성듬성 벌어진 앞니가 환히 드러난다. 유난히 넓은 미간이 도드라지고, 홑꺼풀 눈이 가느다란 실금으로 변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에서 동구의 사진을 다운받았다. 그 얄따란 눈매 너머 까만 눈동자를 오래 들여다본다. 맑고 무욕하여 깊이를 알 수 없는. 착한 영화를 너무 착해서 싫다고 말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좋다’고 말하고 싶을 때 곤혹스러워진다. 선량하고 소박한 영화들이 종종 드러내는 상투적 세계관에 대한 힐난조차 구태의연하게 여겨지는 시절이며, 더구나 이 시절의 대세는 ‘무심한 듯 시크하게’이니 말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내심 위선보다야 차라리 위악을 견디는 편이 덜 불편하다고 믿어왔다. 일찍이 희대의 화제작 <집으로…>를 보고 나서 감읍하여 통곡하기는커녕 싸가지 없는 애새끼에게 호통 한번 못 치도록 외할머니의 입과 귀를 꽁꽁 봉해놓은 행태에 치를 떨었다. 할머니의 꼬부라진 어깨에 얹힌 구구절절한 모성신화에 하도 질려서 아이가 주인공인 이른바 가족영화쪽으로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겠노라 다짐했고 그 소신을 몇해 동안 그럭저럭 지켜왔다.
‘이래도 감동 안 받고 배길래?’의 풀3종세트(가난한 편부모가정, 장애아동, 스포츠를 통한 인간승리)가 고루 갖춰진 영화 <날아라 허동구>를 보게 된 건 그러니 우연일까 운명일까. 첫 장면, 노란 주전자를 앞뒤로 흔들며 도움닫기하듯 도도도도 달리는 동구를 보면서 나는 변절의 순간이 왔음을 알았다. 그리고 또 알았다. 내가 이 작은 아이와 이 작은 영화에 마음을 뺏기게 되리라는 것을.
사랑에도 여러 형태의 감정이 있을 것이다. 동구에 대한 내 사랑은 불우이웃을 향한 긍휼이나 연민, 동정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 연민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다. 나는 극장에서 꽤 자주 우는 인간이지만, 자기중심적 성향이 강한 보통의 관객처럼 영화의 어떤 부분이 내 안의 곪아 있던 상처를 툭 건드렸을 때뿐이다.
“원 스트라이크도 괜찮아. 투 스트라이크도 괜찮아… 그 다음엔 아웃이야!”
뛰고 싶으나 뛸 수 없는 아이, 어려서 체념을 배운 아이 준태가 동구에게 소리치자 저절로 내 인생의 카운트가 헤아려졌다. 등 떠밀려 타석에 설 때 실은 얼마나 조마조마한지, 무서운 속도로 날아드는 공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언젠가 그라운드 밖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말리라는 불안에 얼마나 몸을 떠는지 나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발달장애아 동구의 특수한 이야기가 문득, 보편성을 획득하는 순간이다.
멀거니 선 채 스트라이크 아웃 당하고 싶지 않거든 번트라도 치라는 비밀을 귀띔해주는 존재는 친구다. 우정이란 상대가 집착하는 주전자를 억지로 빼앗거나 버릇을 교정시키려 들지 않는 것, 세속의 가혹한 규칙을 가르쳐주고 규칙을 익히는 지난한 시간을 함께 견뎌주는 것. 영화가 보여주는 이 우정의 방식은 동구-준태, 진규-상철의 관계를 넘어 부자지간에도 적용된다. 아빠는 아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보살피되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둘은 종종 혈연 너머의 오래된 동지처럼 보인다.
결국 집을 지키지 못한 부자가 (어쩌면 더 궁벽한) 새 지역으로 옮겨 가게를 여는 에필로그는 무덤덤해서 인상적이다. 경기의 승리로 잠깐 잊고 있었던 현실을 환기하게 하는 측면에서 그렇다. 진규는 늙어가고, 동구는 자랄 것이다. 동구가 번트로 승리타점을 올리는 기적은 자주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길은 희뿌연 안개 속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아이가 소년이 되고 소년이 청년이 되면서 두 부자가 각각 감당해 나가야 할 어둠과 그림자, 참혹에 관하여 영화는 능히 예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어둠과 그림자, 참혹 뒤에는 가끔 햇빛과 기쁨, 희망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숨겨져 있으니 너무 무서워하지만은 말라고, 정 안 되면 번트라도 대며 부디 살아남으라고 일러준다. 낮은 목소리로 우리를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