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청년, 맨 얼굴을 드러내다
2007-05-17
글 : 박혜명
사진 : 오계옥
<경의선>의 김강우

영화 <경의선>은 김강우의 재발견이다. 이 영화는 삶의 교차점이 전혀 없던 두 남녀의 반나절 인연을 통해 ‘불행한 건 나뿐’이라는 절망과 상처를 지닌 평범한 모두에게 희망과 애정을 담아 보낸다.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영화가 내세운 파편적인 일상들 속에서 김강우는 지하철 기관사 만수로 밥을 먹고 자고 깨고 차분하게 숨을 쉬며 과장없는 삶을 산다. 일상성이 두드러진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종종 어떤 배우가 가진 섬세하고 다양한 질감을 관객이 깊이 음미하도록 돕는 좋은 요리법이다. 이 점에서 <경의선>과 김강우는 궁합이 잘 맞았다. 또렷하고 고분고분할 것 같지 않은 인상에 걸맞게 지금껏 해왔던 스타일리시한 배역들과 김만수는 전혀 다른데, 그 촌스럽고 밋밋한 감색 지하철 기관사 유니폼을 걸친 묵묵한 청년의 하루가 김강우의 맨 얼굴 같은 면을 그럴듯하게 드러내준다.

“연기를 하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비워놓고 하려고 했어요. 배우는 연기를 하려 하면 일단 욕심이 생기기 때문에 매 장면을 채우려고만 하거든요. 그걸 많이 버리려고 했던 것 같아요. 대사도 웬만하면 간결하게, 느낌도 과잉을 넣지 않으려고 했고. 그런 게, 쉬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어렵더라고요.” 현실에 밀착한 순간들을 연출하면서도 (<역전의 명수>로 데뷔한) 박흥식 감독은 배우에게 그리 많은 자유를 허락하진 않은 모양이다. 감독은 영화에서 만수가 쓰는 어색한 문어체 대사들의 토씨가 달라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밝혀진 것이지만 김강우는 영화 속에서 경의선을 타고 가다 조우한 대학강사 한나(손태영)와 밤새 대화하던 도중 울음을 터뜨리는 롱테이크신을 NG 없이 한번에 갔다. 리허설을 몇번이나 했기에 NG를 안 낼 수 있었던 거냐 물으니, 리허설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건 김강우의 뜻이었다. “그런 건 리허설을 하면 안 돼죠. 할 수도 없었고. 그때 만수의 울음은 참고 참다 복받쳐서 터진 거잖아요.” 김강우의 설명을 듣자니 박흥식 감독은 이 장면을 두 가지 앵글로 찍어서 편집해갈 의도였다고 한다. 현장에서 나온 첫 테이크에 계획은 바뀌었고 OK 사인이 떨어졌다. 김강우 스스로도 “그 장면을 다시 찍어봐야 더 좋은 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감독이 처음 자신을 만나 어떤 기대를 했을 것 같냐고 물으니까 김강우는 먼저 웃는다. “잘 모르겠어요. 제가 어울려 보였나? 저는 좀 거짓말을 안 할 거라고 생각하셨나봐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물론 세상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도 그런 정직함의 선입견은 부담스러운지 얼른 덧붙여오는 말. “그런데 저 거짓말 되게 잘하거든요. 아닌 척 되게 잘하는데, 그게 먹히나봐요.” 다만 본래 성격에 기댔을 때 김강우는 속마음을 인내심있게 감추는 타입은 아니다. “상처주는 말은 잘 못하는데 상대방 기분 안 나쁘게 할 말은 해요. 제가 그런 성격이라 상대방도 솔직한 사람들이 좋아요.” 중·고교 시절 6년을 저처럼 시커먼 남자애들과 보내다보니 대학에서 여학생들과 수업 듣고 밥먹는 게 가장 어색했다는 그는 “부드러운 걸 잘 못한다”는 얘기도 한다. “제가 어색해하죠. 그래서 로맨틱코미디 같은 건 좀 어렵더라고요.” <야수와 미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제목을 듣자마자 자기가 멍석을 깐다. “그죠? 불편한 게 보였죠? 아아!” 스크린 안에서 거짓말을 잘하는 타입은 확실히 아닌 듯하다.

2006년에 개봉작이 없었던 그는 올해 <경의선> 이후로 7월에 허영만 동명만화 원작 <식객>, 9월에 스릴러 <가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촬영은 모두 마친 상태. 최근에는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다음 작품 계획이오? 없습니다. (웃더니 매니저를 넘겨다보며) 없다 그러면 안 되는 건가? 아 예, 작품 검토 중입니다. (웃음) 좀 지켜보려고요. 일단 올해 개봉하는 것들 어떻게 되나 좀 지켜보고. 딱히 좋은 시나리오들도 많이 없고, 그냥 무지 상태로 있어요 아직은.” 조급한 마음이야 전혀 없지 않겠지만 기다릴 것이 남은 사람의 여유도 한편 엿보인다. 그는 “배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단 1%도 없었”고 영화 연출을 하려고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지루하고 무의미한 학교 생활을 뒤로하고 “영화가 가장 발전한” 미국으로 유학 준비를 하던 1997년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대학생들의 해외 유학 꿈이 IMF로 좌절된 때였다. 방황하다가 학교로 돌아와서 “솔직히 말하자면 학점을 따기 위해 연기를 시작했는데” 재미있었고, 주변의 칭찬에 우쭐해졌고, 그런 단순한 이유로 연기를 해왔다고 한다. “저는 되게 싫증을 잘 내거든요. 태권도 학원 같은 것도 두달 다니다 마는 스타일이에요. 근데 연기는 질리지 않더라고요.” 그 이유로 지금까지 해왔지만 연기 활동에 절대적인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한다.

그래서 마음도 편해졌다는 그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3년 전 <실미도> 때 인터뷰 기사에 나온 “5년 안에 지명도 10위 안에 들겠다”는 당찬 각오도 어쨌든 그의 것이니까 말이다. “와하하하…. 예, 저한테 있던 지배적인 생각이었고요, 저는 지는 거 되게 싫어해가지고, 무슨 일을 해도 그렇게 등수를 정해야 하는 건 줄 알았어요. (웃음) 그래야 행복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요, 이젠.” 그때의 구호를 곱씹는지 조용하던 그가 덧붙인다. “되게 촌스러운 말이었어요. 놀림 많이 당했습니다. 감독님들한테.”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지금의 김강우는 <태풍태양> <나는 달린다>의 매력적인 마초들에 비해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을 아는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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