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續 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카페 뤼미에르> -정홍수
2007-05-25
흔들리는 사이로 언뜻 보이는 푸른빛

두달 전 아이들을 데리고 도쿄에 간 적이 있다. 돌아오기 전날이었다. 우에노공원과 도쿄대 캠퍼스를 둘러보고 나니 2월의 해는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침부터 걷느라 지친 아이들은 그만 호텔로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다. 욕심 부릴 계제가 아니었다. 혼고 산초메역이었나. 도쿄대 앞 지하철역에서 숙소가 있는 고탄다쪽으로 갈 노선도를 살피고 있는데, 역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차노미즈역. 바로 다음 역이었다.

나는 이 역을 안다. 도심 한복판을 흐르는 강을 끼고 서 있는 역. 붉은색 아치형 철교 아래로 자그마한 터널이 있고, 다시 그 옆을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철길까지 모두 세개의 노선이 겹치며 흘러가는 곳. 히지리바시(聖橋)라는 다리에 서면 강과 함께 색색의 전철들이 겹치며 흘러가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철교 아래로, 누군가가 토해낸 듯 문득 터널을 빠져나와 다시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전철의 흐름을 보고 있노라면 거기 세상의 비의 한 자락이 잠시 그렇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같지 않던가. 그 흐르고 흐르는 풍경은 대도시 교통의 질서가 빚어낸 한갓 우연일 테지만 어쩐지 살아간다는 것은 그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막막한 목메임을 주지 않던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난 거기 다리 위에 서보긴커녕 오차노미즈역에도 가본 적이 없지 않은가. 허우샤오시엔의 영화 <카페 뤼미에르>(2003)는 그렇게 실제보다 먼저 어떤 공간의 풍경을 내 마음속에 완성해놓고 있었다.

안국동 풍문여고 담을 따라 아트선재센터로 가는 길 중간에는 수령이 꽤 오래되어 보이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지금쯤 신록의 푸르름이 서럽게 올라오고 있으리라. 난 그곳을 지날 때면 그 나무 아래에서 <동년왕사>(1985)의 소년 아효(유안순)를 보곤 한다. 수수깡 같은 것을 빨고 있었던가.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의 죽음을 차례로 겪으며 소년은 세상의 시간 속으로 성장해가고 마을 동구의 그 크고 푸르른 나무는 다만 거기 그렇게 비와 바람 속에 서 있었다. 그 아효가 사랑했던 소녀 우수메이(나는 이 역을 맡은 배우의 이름을 좋아한다. 辛樹芬. 난 아무 때고 그냥 이 이름을 종이에 쓰곤 한다)는 <연연풍진>(1986)에서 우편배달부와 결혼하여 또 한 소년을 울게 만들지만, <비정성시>(1989)에서는 누구보다도 강하게 그 많은 세상의 슬픔을 받아들이고 견딘다. 한밤중 남편 문청(양조위)한테 오빠의 체포 소식을 전해들은 뒤, 잠시 울음을 미루고 아이에게 마저 밥을 먹이는 모습을 난 어떤 부끄러움 없이 떠올릴 수 없다. 만일 있다면, 그런 것이 삶이리라.

피곤해하는 아이들을 끌고 히지리바시 다리 위에 서니 바람이 세찼다. 신기하고 멋지지 않으냐고 혼자 흥분해 떠들었지만 아이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사진이나 몇장 찍을 밖에 더 할 일도 없었다. 오전 10시 몇분인가, 하루에 한번 다섯대의 전철이 동시에 오차노미즈역을 지나간다고 한다. 그것은 기적일까. 흐르고 흐르는 전철의 풍경 위로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여주인공 요코(히토토 요)가 부르는 주제가가 <카페 뤼미에르>의 마지막을 길게 이끈다. DVD로 다시 영화를 보다 보니 전에 흘려버렸던 가사 한 대목이 귀에 들어온다. “흔들리는 사이로 언뜻 보이는 푸른빛/ 흘러가버린 게 누구였더라/ 기쁨과 외로움이 하나가 되는/ 집으로 가는 길에 생각에 잠긴다/ 좋은 일 같은 거 없어도 좋아/ 있으면 좋겠지만 (…)” 흔들리는 사이로 언뜻 보이는 푸른빛, 그렇다. 허우샤우시엔 영화는 그 순간의 기록이다. 난 <남국재견>(1996)에서 두대의 오토바이가 남국의 산등성을 오르는 장면을 떠올린다. 머릿속이 환해진다.

정홍수/도서출판 강 대표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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