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16일 아침 10시 칸영화제 개막작인 왕가위 감독의 신작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기자시사가 열렸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사랑에 중독된 인간들의 이야기다. 리지(노라 존스)는 헤어진 연인이 종종 들르는 까페의 주인 제레미(주드 로)을 찾아가 연인에게 열쇠를 전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연인은 결코 열쇠를 찾아가지 않는다. 상심에 빠진 리지에게 제레미는 "누구도 주문하지 않아 언제나 홀로 남겨지는" 블루베리 파이를 권한다. 리지는 매일 밤 까페를 찾아 한 접시의 블루베리 파이를 먹고, 제레미는 그녀에게 조금씩 빠져든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리지는 미국을 횡단하는 여행을 떠난다. 기약없는 여정에서 그녀는 부인(레이첼 바이스)과의 별거로 고통받는 경찰 어니(데이빗 스트라다인), 타인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못하는 전문 갬블러 레슬리(나탈리 포트먼)를 만난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익숙한 왕가위와 낯선 왕가위의 세계가 기묘하게 조합된 영화다. 장숙평은 여전히 영화의 편집과 프로덕션, 의상 디자인을 전담하고 있으나 카메라를 잡은 것은 크리스토퍼 도일이 아닌 다리우스 콘쥐다. 콘쥐의 카메라로 비추어진 골.목의 모퉁이와 호텔방과 까페는 종종 시적이다. "잃어버린 사랑과 멜랑콜리와 고독, 그리고 기억의 왈츠들을 주제로 새로운 배우들과 만든 영화"라는 왕가위의 설명은 <마이 블루베리 나잇>을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일 것이다. 언어와 배경이 바뀌었을 지언정 9번째 왈츠의 리듬에 특별한 변주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같은 기시감은 왕가위의 지속적인 세계속에서는 장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어째 왕가위의 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마저 이상할 정도로 낡아보이는 영화다. 특히 왕가위가 직접 쓴 대사들은 로렌스 블록의 퇴고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소환되는 순간 이상할 정도로 덜자란 십대 소년의 일기장의 목소리처럼 들려진다. "배우들의 대사 전달이 완벽하게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왕가위의 경구적인 금언들은 너무 진부해서 영화를 피상적으로 보이게 만든다"고 불평을 늘어놓은 <버라이어티 데일리>의 말은 일리가 있다. "비인간적인 센티멘탈리즘으로 포장되어있는, 원본이라기 보다는 카피본"이라는 <르 피가로>의 말처럼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영어로 만들어진 중경삼림의 카피처럼 가볍다. <2046>으로 왕가위 세계를 결산하며 다른 세계로의 확장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90년대 청년 시네아스트 시절로의 회귀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마이 블루베리 나잇> 기자회견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 그것도 영화제를 여는 개막작으로 신작을 출품한 이유는 뭔가.
=왕가위/작년 칸영화제가 끝나자마자 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다시 칸으로 돌아와서 영화를 마무리지으면 근사할 것 같았다. 다들 알다시피 내 영화는 언제나 영화제 제일 마지막에만 상영되지 않았나.(좌중 웃음) 칸 개막작으로 선정됐다니까 다들 날더러 미쳤다고 하더라. 사실 이틀전에 겨우 후반작업을 끝냈다.(좌중 한숨과 웃음) 개막작으로 상영되는데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기를 바랬다.-미국에서 영어로 영화를 만들면서 어떠한 변화를 겪었나.
=왕가위/가장 어려운 도전은 영어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중국 감독들이 만든 미국 영화를 보면 종종 부끄러워질 때가 있지 않나. 캐릭터를 지나치게 이국적으로 그린다던가. 그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궁리를 많이 했다. 이를테면 중국과 서구 관객들이 생각하는 키스의 의미는 다르다. 그래서 키스씬을 찍으면서도 노라 존스와 주드 로의 의견을 많이 물어봤다. 그리고 나서, 결과적으로 나는 믿게 됐다. 국가와 문화를 넘어선 공감대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주드 로/ 왕가위와는 특히 리듬과 속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확실히 두 요소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노라와 나는 마치 음악적인 듀엣처럼 연기했다. 왕가위와 일하는 것은 확실히 창조적인 역량을 일깨우는 작업이다.
-원래 2001년 칸에서 상영됐던 단편영화 <In The Mood of Love 2001>가 영화 곳곳에 믹스되어 있는 것 같다.
=왕가위/ 사실이다. 이 영화는 그 단편영화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원래는 <화양연화>에 삽입될 부분인데 <마이 블루베리 나이트>로 ‘확장’된 것이다. 리메이크가 아니라 확장이다. 첫번째 뉴욕 챕터가 단편의 내용이고, 거기서부터 멤피스와 네바다에 이르기까지 이야기가 이어진다. 영화를 만들면서 ‘이건 혹시 로드 무비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여행(Journey)에 대한 영화라기 보다는 거리(Distance)에 대한 영화라는 게 맞는 것 같다.-왕가위 영화로 연기를 시작한 이유는 뭔가.
=노라 존스/ 계획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가 나의 문을 두드렸을 따름이다. 처음에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투어중에 <화양연화>를 봤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한번 점심이나 한끼 해볼까? 혹시 날더러 사운드트랙에 참여해달랄지도 몰라. 이런 생각에 만났더니 배우로 출연하고 싶냐더라. 그래서, 오....오케이? 라고 했다.(웃음) 계속 배우를 하겠냐고? 지금은 아주 긴 투어를 계획중이어서 생각할 틈도 없다.=왕가위/ 이 영화는 내가 노라로부터 본 가능성으로부터 시작한 거나 다름없다. 아주 영화적인 목소리. 훌륭한 악기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노라는 영화의 모든 챕터에 등장한다. 신인 배우로서는 큰 모험이다. 첫 촬영때는 어떻게 긴장을 푸는 지도 몰랐다. "연기를 해야하나요?"라고 물어보길래 "그냥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라고 말했다. 하지만 키스 장면을 촬영할 때는 "그냥 저 하는대로 하면 되나요?"라고 물어보길래 대답했다. "여기서는 연기를 해야해!"(좌중 웃음)
-"블루베리 파이는 항상 팔리지 않고 남는다"는 대사에 동의할 수 없다.(좌중 웃음) 그나저나 왜 블루베리 파이인가.
=왕가위/ 노라 존스에게 가장 싫어하는 파이가 뭐냐고 물었더니 블루베리 파이라길래.(좌중 웃음) 그녀에게는 파이를 먹는 장면의 촬영이 끊임없는 고문이었을거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