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돌아가는 강냉이 기계. 거칠게 쥔 손. 세월의 고됨이 느껴지는 할아버지의 얼굴.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변해 다시 봄. 그 시작을 알리는 기운은 아직 자리를 뜨지 못한 겨울의 침묵이다. 베이징 외곽의 어느 마을, 홀로 남겨진 할아버지에게 맑은 미소의 소녀가 다가온다. 할아버지가 강냉이 기계를 돌리자 소녀는 나무 주위를 돌고, 할아버지의 손동작이 빨라지자 소녀의 발걸음도 빨라진다. 한 바퀴, 두 바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던 마을에 뻥 소리가 울리고, 강냉이는 배꽃의 잎이 되어 포대에 고스란히 담긴다. 봄을 피운 할아버지와 소녀의 움직임. 시간은 아무 소리도 없이 오다가, 순간 사람을 놀라게 한다. 갑자기 움트는 새싹들처럼.
6분이란 짧은 시간 안에 봄의 도착을 담아낸 이 영화는 베이징영화학교 감독과를 졸업한 이한얼 감독의 작품이다. 제목은 <봄이요!>. 계절을 바라보는 시선이 꾸밈없이 솔직하다. 소설가 이외수씨의 아들이기도 한 이한얼 감독은 “마음 공부를 하라”는 부모님의 조언으로 동국대학교 선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미련”이 계속 그를 괴롭혔고, 학교의 수업 내용은 마음 공부라기보다 불교학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그는 “적응하지 못한 학교”를 떠나기로 결정했고, 이후 우연히 떠난 중국여행에서 우리나라의 70, 80년대를 연상시키는 풍광에 취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던 마음을 접고”, 중국행을 결정한 것도 그 무렵이다. 그리고 7년. 어학연수와 학사과정 4년을 중국에서 보내며 그는 영화를 대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세워나갔다. <봄이요!>에 대한 반응도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이 베이징영화학교라 역시 다르다”는 코멘트가 가장 기뻤다고 말한다. 베이징영화학교 출신다운 시선과 자세,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아마 순수, 진심이라 믿고 있는 것 같다. “진심이 가장 세련된 표현인 것 같다.”
밖으로 내놓은 지 2년이나 지난 “자식이지만”, 그는 작품에 대해 조심스러웠고, 설레는 것 같았다. “사실 처음 영화를 만들어놓고는 보지도 않았다. 못 만들었고(웃음), 내가 의도한 것들을 다 담지 못해서 아쉬웠다.” 3명의 학생에게 주어진 5분 분량의 16mm 필름으로, 오전 6시면 엑스트라로 출연하기 위해 베이징종합촬영소 앞에 몰려온 사람들 중 할아버지를 캐스팅하고, 소녀 배우를 캐스팅하면서는 유괴범 취급도 받으며 그는 <봄이요!>를 만들었다. 촬영 이틀 전에는 비바람이 불어닥쳐 만개한 배꽃 나무를 화면에 담지 못했고, 촬영 이튿날에는 갑자기 할아버지가 사라져 마음을 태웠다. 학교에서 대여한 카메라는 무심하게도 다음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봄이요!>는 이한얼 감독에게 어디까지나 못난 자식이다. “모자라고 부족하다.”
하지만 그가 영화를 통해 배운 건 아무래도 ‘마음 공부’가 아닐까. “창조적인 소수”가 되기 위해, 아버지와는 또 다른 길에서 자신의 꿈을 찾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충무로의 시스템과 현장 능력을 기르기 위해” 현재 류승완 감독의 새 영화 <야차>의 연출부 스탭으로 일하고 있다. 자신의 영화를 보고 “그게 뭐냐”고 툭툭 내뱉는 이외수씨의 반응에도 “좋은 영화 만들라고 그러시는 거”라며 기분 좋은 웃음으로 받아넘긴다. 이번 인터뷰에 대해서는 매달 3편씩 선정되는 ‘이달의 단편’ 중 자신이 인터뷰 대상자로 선정된 것이 영광이라라며 감사를 표했다. 인터뷰 전날 밤은 뜬눈으로 지샜다고 한다. 떨리고 긴장된다며. <봄이요!>의 설레는 순간은 바로 이한얼 감독의 진심이 아닐까. “할아버지에게 소녀가 봄의 요정”이었듯이 이한얼 감독에겐 아마도 영화가 그런 존재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