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신저토크]
[메신저토크] <캐리비안 해적> 머리도 좋고 운도 좋은 영화예요
2007-06-07
글 : 이동진 (영화평론가)
글 : 김혜리
이동진 “몸은 <미이라>인데 마음은 <반지의 제왕>이에요” vs 김혜리 “조니 뎁의 무성영화 배우적 특성을 주류로 불러냈죠.”

럼주 한병 추가님(김혜리 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자사모님(이동진 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자사모님의 말(이하 자사모): 오늘 제 대화명은 ‘자학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입니다. -.-

럼주 한병 추가님의 말(이하 럼주병): <상성: 상처받은 도시>와 >팩토리 걸> 때문인가요? ^^

자사모: 전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이하 <캐리비안의 해적3>)에서 윌(올랜도 블룸)의 사랑도 자학적이고 피학적이라고 봅니다.

럼주병:<캐리비안의 해적3>는 기자시사가 없었고 오늘(5월23일) 개봉했죠. 오전에 보고 왔는데 2시간50분을 해적선에서 출렁거렸더니만 지금도 배멀미 중이에요. 바다에서 주로 전개되는 러닝타임 긴 영화는 귀밑에 멀미약 패치라도 붙이고 가야겠어요.

자사모: 블록버스터가 바다로만 가면 영화가 턱없이 길어진다는…. <타이타닉>은 오죽하면 2시간74분이라고 당시 마케팅을 했을까. <워터월드>도 2시간이 훨씬 넘죠. 물에서 찍으면 생체리듬 자체가 달라지나봐요.

럼주병: 아 참, <캐리비안의 해적3>에 쿠키(엔딩 크레딧 뒤에 숨겨놓은 장면) 있던데 보셨나요?

자사모: 기사 마감이 급해서 나오기 바빴답니다. -_-#

럼주병:(스포일러!) 10년 뒤 엘리자베스(키라 나이틀리)와 아이의 모습인데요. 저는 눈에 뭐가 씌었는지 어째 아이가 윌 말고 잭 스패로우(조니 뎁)를 닮은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

자사모: 그래야 더 재미있을 듯. ^^

럼주병: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는 굉장히 꼼꼼히 이야기가 연결된 연작이라, 3편쯤 되니까 전편을 보지 못한 관객은 조금 부담이 있을 것 같던데요.

자사모: 확실히 그렇죠. <스파이더맨 3>는 전작을 안 봐도 즐기는데 별 무리없지만 이 영화는 전작들을 봐야 제대로 즐길 수 있어요. 3편을 보니 2편에서는 제작진이 3편을 위해 힘 조절을 한 것 같더라고요. 다들 너무 예술을 하려고 하신다는…. 일종의 <반지의 제왕> 증후군입니다.

럼주병: 이야기의 연속성에 대한 유난스런 집착도 말씀드렸지만, 2편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도 평은 좋지 않았지만, 관습적인 블록버스터 서사는 아니었어요.

자사모: 캐릭터도 그렇죠. 이 시리즈, 마음에 들어요.

럼주병: 3편의 첫 장면이 무려 집단교수형이에요. 여름 대작영화로는 대담하리만큼 울적한 오프닝이더군요. 교수대에 선 소년의 노래가 군중의 합창으로 확산되는 모습이 멋져서 영화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었죠.

자사모: 생각보다 야심이 훨씬 큰 영화였던 듯합니다. 원래 1편이 성공하고 2, 3편으로 이어지면 다들 작심하고 영화를 만들잖아요. 그러다 나온 최악의 사례가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형제죠. <캐리비안의 해적>은 몸은 <미이라>에 가까운데 마음은 <반지의 제왕>인 영화예요. ^_^

럼주병: <미이라>보다 <캐리비안의 해적>이 훨씬 잘 만든 영화인 건 분명하죠. 제작진이 스토리와 캐릭터에 품은 애정도 깊고 상상력도 훨씬 풍부하지 않아요?

자사모: 동의해요. 그리고 2편보다는 3편이 더 재미있고요.

럼주병: <매트릭스>가 나와서 말이지만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도 시스템과 시스템 바깥의 방외인들 이야기예요. 이 영화의 해적을 가리켜 ‘로커’ 같은 존재라고들 표현하는데, 이 해적들은 일종의 무정부주의자들로 봐도 좋을 것 같아요. 바다는 땅을 지배하는 정치권력의 힘이 미치지 않는 일종의 해방구고요. 그런데 시대가 바뀌어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대변하는 자본주의, 물질주의 체제가 이 이탈자들을 몰아내거나 순치하려고 하죠.

자사모: 3편의 러닝타임이 2시간48분인데 제작진은 아마 3시간48분으로 만들고 싶었을 거예요. 꼬여 있는 스토리의 모순을 지적하면 제작진이 미처 다 못 붙인 필름을 들고 나와서 “그게 사실은 말이죠” 하면서 해명할 듯한 느낌. ^^ DVD 서플먼트가 자못 기대돼요.

럼주병: 3시간48분! 그건 정말 도시락과 럼주를 휴대하고 보러 가야겠어요.

자사모: 저는 그런데 대사들이 지나치게 폼을 잡는다 싶더라고요. 경구 스타일이 너무 잦다는 거죠. 운명이니 영생이니 죽음이니 삶이니 어찌나 자주 등장하는지.

럼주병: 이번엔 세상의 끝과 저승이 영화에 진짜 등장하기 때문 아닐까요? <반지의 제왕>을 언급하시니 말인데, 반지원정대는 의리에 죽고 사는 반면 캐리비안의 이 자들은 서로 돌아가면서 뒤통수를 치고 배신을 하니 도시 믿을 수가 없어요. 그 점이 긴장을 유지하는 힘이기도 하고 동시에 조금 피곤한 요소이기도 한 것 같아요. 어째 고결한 캐릭터가 하나도 없담. ^^

자사모: 그것이 이 시리즈의 매력이죠. ^^ 저는 윌과 엘리자베스의 사랑이 <반지의 제왕>의 아르웬과 아라곤의 사랑을 뒤집어 그려낸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르웬이 사랑 때문에 영생을 버리고 유한한 인간의 몸을 빌렸다면, 윌은 사랑 때문에 반대의 길을 걷는 거죠. 선택의 주체도 남자와 여자를 바꾸어놓고.

럼주병: 그런데 결론이 저로선 조금 석연치 않았어요. 저는 2편부터 엘리자베스가 잭 스패로우에게 본능적으로, 아니 관능적으로 강하게 끌린다고 느꼈거든요. 1편에서는 잭 스패로우가 게이 캐릭터로 보였지만 2편에서 엘리자베스가 잭에게 키스해 혼을 빼 배와 함께 수장시키는 장면은, 잭을 향한 자기 마음의 흔들림과 연인인 윌을 배신하는 잠재적 죄책감을 더불어 물밑에 가라앉히는 것 같았어요. 3편에서도 윌과 말다툼 끝에 “그럼 날 믿지 마” 하잖아요?

자사모: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듯. ‘나쁜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여자들의 특성이랄까. ^^

럼주병: 조니 뎁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뭐 여전한 연기지만요.

자사모: 대단하죠, 만일 다른 배우였다면 잭의 캐릭터는 그냥 화자 역할에 묻혔을 거예요. 조니 뎁이 이 시리즈에 개성을 불어넣었죠. 사실 그가 원래 이런 연기를 잘하잖아요.

럼주병: 조니 뎁은 <베니와 준>에서부터 마임 연기의 재능을 보였는데,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가 그의 무성영화 배우적인 특성을 상업적 주류로 끌어냈어요. 물론, 그전에 팀 버튼 감독님의 업적이 있었지만.

자사모: <베니와 준>의 느낌도 있고 여장을 하고 나왔던 <비포 나잇 폴스>의 느낌도 약간 있죠. 해적영화 하면, 에롤 플린이나 버트 랭커스터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 해적영웅이라고 테스토스테론 덩어리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 멋진 캐릭터죠.

럼주병: 잭 스패로우는 육지에서 걸을 때도 갑판 위에 있는 것처럼 흔들거려요. 뛸 때는 흡사 목도리 도마뱀이고. ^0^ <캐리비안의 해적> 1편에서 잭 스패로우 선장의 첫 등장은, 영화 사상 꼽히는 캐릭터 소개 장면일 거예요. 그래서 2편과 3편은 잭을 어떻게 등장시키고 퇴장시키느냐에 알게 모르게 큰 부담을 안고 있는 듯해요. 이번에는 코의 거대한 클로즈업부터 나오던데 모공이 너무 커져서 슬펐다죠. 1995년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줄담배를 피우는데도 피부가 도자기였는데.

자사모: 조니 뎁이 잠시 웃통 벗은 몸을 보이는데 상당히 안습이더군요. 배까지 복대로 두르다시피 했는데도 몸이 완전히 망가져 계시더라는. 속으로 살짝 기분 좋았습니다. 40대면 조니 뎁도 저 정도라 이거지? 룰루랄라. ^.~

럼주병: 헉. 유네스코에서 급히 영양사와 트레이너를 파견해 문화재를 사수해야 합니다!

자사모: 조니 뎁은 망가져도 돼요. 앗, 조니 뎁 닮은 <씨네21> 편집장님 화내시겠다. ^^ 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저승의 갖가지 이미지였어요. 특히 혼령들이 바다를 떠가는 장면! 존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 <오필리아>도 생각나고 영국 밴드 뮤즈의 앨범 재킷도 생각나고.

럼주병: <우주전쟁>에서도 강물에 시체들이 떠내려가는 장면이 있었죠. 그쪽이 훨씬 끔찍했지만.

자사모: 감독들은 한번쯤 꿈속의 장면을 영상으로 옮겨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 같아요.

럼주병: 배경이 하얗게 텅 비어 있는 저승장면들이 달리와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회화를 볼 때와 비슷한 쾌감을 주더군요.

자사모: 아무리 할리우드영화지만 윌과 엘리자베스가 칼싸움 틈틈이 주례까지 모시고 결혼하는 장면은 좀 깨더군요. 사실 상당히 풍부한 텍스트인데 거의 피학적이고 자학적인 로맨티시즘으로 마침표를 찍느라 이야기가 좀 뻔하게 끝난 감이 없지 않아요.

럼주병: 플라잉 더치맨 호의 선장과 관련된 전설이 소개됐을 때 전 솔직히 잭 스패로우를 ‘최후의 해적’으로 만들어 관객이 ‘지금도 어딘가 항해하고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게 하지 않을까도 싶었는데, 역시 잭은 지저분한 부둣가에서 흰소리 떠벌리고 다녀야 제 맛이라고 판단했나봐요.

자사모: 참, 데비 존스 선장이 문어발로 눈물 훔치는 장면도 좋았답니다. ^^

럼주병: <캐리비안의 해적>은 확실히 캐릭터나 패션, 이야기에서 자기 스타일을 갖고 있는 영화예요. 저는 특히 노량진 수산시장을 연상시키는 비주얼을 정겨워하는데요. 음…, 선배, 솔직히 2편부터 등장한 대왕문어 괴물 크라켄 말이에요. 뭐랄까, 맛있게 생기지 않았어요? 윤기나고 탱탱하고. -_-# 혹시 상영관 앞에서 ‘크라켄 다리 맥반석구이’ 같은 거 팔면 잘되지 않을까요?

자사모: 역시 우리는 사업구상을 더 잘한다는. --; 지난번에 구상한 정성일 선생 캐릭터 인형도 팔고요.

럼주병: 선배와 제가 사업을 시작하면 “이보다 아름다운 장면을 알지 못합니다”라는 인형 내장 멘트를 녹음하러 기꺼이 오시겠다는 정성일 선배의 전갈이 있었습니다. ^0^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요. 주윤발은 싱가포르 해적영주로 나왔는데, 굴욕까진 아니더라도 위엄없는 캐릭터였죠.

자사모: 아시아 팬들이 보면 열 오를 만한 캐릭터죠. 제가 재봤는데 시간적으로도 딱 80분 만에 퇴장하더군요. 이 영화는 아무래도 고어 버빈스키 감독의 영화라기보다는 또 한편의 제리 브룩하이머 영화라고 봐야겠죠?

럼주병: 글쎄요. 확신할 수 없군요. 작가의 색깔인지 연출자의 색깔인지 분명 독창적인 매너와 스타일이 보이니까요.

자사모: 스토리 버벅대는 면은 <멕시칸>, 으스스한 구석은 <링>, 돛대 위 추격전은 <마우스 헌트> 닮았으니 고어 버빈스키스러운 면도 있어요. ^^ <마우스 헌트> 때 버빈스키를 인터뷰했는데,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재미있는 분이었어요. 손가락과 입모양으로 쥐 흉내까지 내던걸요.

럼주병: 아! 그런 분이군요.

자사모: 이 영화에서 제독이 탈출하는 잭을 바라보며 “머리가 좋은 걸까요. 운이 좋은 걸까요?” 그러잖아요? 저는 이 정도면 영화가 머리도 좋고 운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럼주병: 즐길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려도 돈 아깝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을 스타일의 영화고 열심히 보는 사람은 더 많은 재미를 얻을 수 있는 종류의 영화예요. 한 가지만 보태자면 요즘 블록버스터를 볼 때면 자주 조지 부시가 떠올라요. 이번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다민족으로 구성된 해적들이 연합군을 결성해 동인도 회사와 해전을 벌이는 과정의 몇 장면이 그랬고요. 정의니 악이니 하는 개념이 하도 구식으로 취급되다보니 기묘하게도 액션블록버스터들이 (감히) 그런 가치를 입에 올리는 영화로 남은 건지도 몰라요.

자사모: 전 이 영화가 세계화에 반대하는 다국적 연합군의 저항에 대한 영화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농담처럼. ^^

럼주병: 재벌가의 딸로 앤디 워홀의 뮤즈가 된 <팩토리 걸>의 주인공 에디 세즈윅(시에나 밀러)도 잭 스패로우 선장 못잖은 스모키 메이크업의 애용자더군요.

자사모: 전 스모키 메이크업이란 말을 이번에 처음 알았답니다. 그을린 것 같다는 뜻인가요? 야생마 같다는 뜻인가요?

럼주병: 어서 고향 별로 돌아가시라니까요. ^_^

자사모: 시에나 밀러 좋았죠? 주드 로의 애인, 패션 리더, 스캔들 메이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니 연기도 꽤 잘하더군요.

럼주병: 아름답더군요. 연기도 유연하고요.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실제 세즈윅 사진과 비교해보니 실제 인물은 공주 같은 당당함이 있고 시에나 밀러는 연약한 소녀의 인상이 강하던데요.

자사모: <팩토리 걸>을 보며 세편의 영화를 떠올렸어요.

럼주병: 혹시 제니퍼 제이슨 리의 <조지아>?

자사모: <벨벳 골드마인> <까미유 끌로델> <레퀴엠>(<조지아>도 가능하긴 하죠).

럼주병: <까미유 끌로델>은 남성 예술가가 여성에게서 영감(靈感)을 착취한다는 점에서겠죠?

자사모: <벨벳 골드마인>과는 명성이 어떻게 한 인간을 좀먹는지를 관찰한 스케치가 흡사하고, 에디의 망가져가는 모습은 <레퀴엠>의 제니퍼 코넬리를 떠올리게 하죠. 고백건대 전 이런 스타일의 영화를 좋아해요. 일종의 인생유전 이야기. <부기 나이트> 같은 작품. ^^ 하지만 미국 리뷰 중에는 “그래 좋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 여자에게 감정을 이입해야 하지?”라는 혹평도 있더군요. -.-

럼주병: 요즘 극장가에 패리스 힐튼의 전생(?)이 떠도는군요.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렇고.

자사모: 아, <팩토리 걸>에도 <마리 앙투아네트>에 이어 <아이 원트 캔디> 노래가 나오더군요. 이 영화 쪽이 훨씬 어울리더군요.

럼주병: <바스키아>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앤디 워홀은 영화에서 자꾸 착취자, 기생자처럼 묘사돼요.

자사모: 그렇죠. <팩토리 걸>은 앤디 워홀을 차갑게 묘사한 반면 밥 딜런은 상당히 호의적으로 그렸더군요. 거의 구원자처럼. 감독이나 작가가 워홀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 듯. ^^ 하긴 미국 지식인들 중에서 밥 딜런을 숭배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럼주병: 정말 세상에 외칠 이야기를 가진 예술가와, 기존의 어법 자체를 뒤집어서 그 방식을 메시지로 만드는 부정의 예술가를 대조하는 셈이죠. 영화에는 법적 문제 때문인지 밥 딜런이 뮤지션 빌리라고만 나오던데요. 그런데 어찌 보면 밥 딜런이 이 영화의 피해자일지도. ^^; 빌리 역을 맡은 헤이든 크리스텐슨이 “세계는 불타고 있는데 너희는 무슨 삽질하는 거야” 식의 대사를 웅얼거릴 때는 진실한 예술가라기보다 겉늙은 철부지 같기도 하고 부유한 아티스트의 제스처처럼 보이기도 해서 불편했거든요.

자사모: 저도 크리스텐슨의 연기는 별로였습니다. 워홀 역의 가이 피어스는 좋았지만. 크리스텐슨은 밥 딜런 영상을 보고 또 보면서 목소리와 동작을 연구한 것 같더군요. 그런데 사실 그맘때 밥 딜런, 당시 공연다큐멘터리 <돈 룩 백>을 최근에 봤는데 진짜 철부지 맞던데요. ^_^ 이 영화를 상당히 흥미롭게 본 편이지만 그럼에도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후반부의 안이한 인물 해석이에요. 중반까지의 흥미진진함에 비하면 후반부는 철저히 수난극으로 짜여 그녀를 그저 희생자로만 묘사했어요.

럼주병: 제 목에 걸렸던 가장 큰 가시도 에디를 완벽한 희생자로만 보는 시선이었어요. 영화에 따르면 이 여자의 생이 망가진 이유는, 나쁜 아버지가 폭행하고 앤디 워홀과 밥 딜런이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건가요? 오히려 엔딩 크레딧에서 실존 인물들이 에디 세즈윅을 회고하며 “ ‘사랑해’라고 말하면 형언할 수 없는 미소를 즉각 떠올리는 여자였다” 라는 말들이 더 입체적으로 한 여자를 상상하게 했어요.

자사모: 영화대로 해석하면 에디는 어린 시절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남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인생을 산 거죠. 설혹 그런 인생을 살았더라도, 영화 후반부의 인물 묘사는 중반까지의 캐릭터 스케치와 충돌하는 지점도 상당히 많아요.

럼주병: 전화 통화 장면이 지나치게 많은 것도 특징이에요. 앤디 워홀과 에디는 얼굴을 맞대고는 진지한 대화를 꺼내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자사모: 워홀이 실제 그런 스타일의 독특한 남자였으니까요. 둘의 관계에서 키는 분명히 워홀이 쥐고 있었죠. 밥 딜런과의 관계에서도 그랬고. 에디는 무엇보다 명성에 휘둘린 여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럼주명: 이 영화의 인물들은 서로의 명성, 매력, 광채에 도취되어 있죠.

자사모: 밥 딜런과 앤디 워홀이 딱 한번 만나는 장면에서 워홀이 제일 처음 한 말이 “사인 좀 해주시겠어요?”예요. 더 명성 많은 자에게 덜 명성있는 자가 굽히는 거죠. 어떤 척도는 그 척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더 신봉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를테면, 명성을 숭앙하는 정도는 조금이라도 명성이 있는 경우일수록 더 그렇다는 거죠.

럼주병: 전 오스카 시상식처럼 유명인들이 한데 모이는 행사의 중계를 볼 때면, 스타들 대다수가 스스로도 다른 스타들과 한 장소에 나란히 어울려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흥분하고 고양되어 있다는 기운을 느껴요.

자사모: 명성의 거대한 서클 안에 함께 들어 있는 것을 서로서로 확인해주면서 안심들 하고 계시는 거죠.

럼주병: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죠. 어린 시절 그런 광경에서 대중문화에 최초의 매력을 느꼈을 수도 있고요.

자사모: 암튼 저는 <팩토리 걸>이 상당히 좋았고 감동도 받았어요. 예술은 결국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중반까지의 쿨한 스케치도 좋았고요.

럼주병: <팩토리 걸>은 당대(60년대 중반) 패션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흐뭇한 눈요기가 될 거예요. 사다리꼴 미니 드레스나 타이츠, 스모키 메이크업과 짧게 자른 머리는 요즘 유행이기도 하고요. 참, “난 엄청 얄팍한 인간이에요. 그리고 그 길로 쭉 나갈래요” 하는 대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

자사모: <가족의 탄생>식으로 말하면 “천박한 게 나쁜 거야?”군요. ^_^

럼주병: 다음에 거론할 영화는 <상성: 상처받은 도시>(이하 <상성>) 인데요. 오늘 이야기하는 영화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어지럼증을 유발하는군요. <상성>에서는 금성무가 술에 절어 사는데, 거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껌 씹는 빈도에 버금가게 위스키를 들이켜더군요. 과음한 이튿날 이 영화를 보면 무진장 괴로울 것 같았어요. 숙취 심할 때는 술병의 상표만 봐도 고통스럽잖아요.

자사모: 저는 술병으로 나발을 부는 장면이 있는 영화들은 일단 의심부터 하고 봅니다. 인물의 상처나 고통을 가장 손쉽고 관성적인 방법으로 그려내는 것이니까요. 솔직히 아픔을 잊기 위해 약물이나 음주에 탐닉한다는 건 과장일 확률이 높죠.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이유를 영화는 너무 쉽게 정신적 이유로 위장하죠. <상성>은 모든 면에서 무간도보다 처지는 영화인 것 같아요. <무간도>의 뛰어남이 우연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잠시 했어요.

럼주병: 홍콩 영화계에서 <무간도>가 차지하는 지위는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모양이던데요. <상성>을 보고 나니 <무간도>의 성취 이후 유위강, 맥조휘 감독이 적어도 발전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사모: 이번에 홍콩에서 두 감독님을 인터뷰했는데 할리우드에서 <무간도>와 <상성>이 리메이크된 것을 몹시 자랑스러워하더군요.

럼주병: 할리우드 리메이크된다는 사실 자체를 작품의 평가로 보시나요? <상성>의 초반, 즉 아방(금성무)이 연인 때문에 낙망해서 술독에 빠지기 전까지는 좋았어요. 홍콩은 꼭 마이클 만 영화 속 마이애미처럼 보이고 바보스러운 대사도 없고 인물의 성격도 간결하게 소개한 도입부였어요.

자사모: 저 역시 아방의 전사(前史)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죠.

럼주병: 이 영화에서 유정희(양조위) 장인의 살해범은 일찌감치 노출, 혹은 암시되죠. 즉 수수께끼는 ‘어떻게’와 ‘왜’거든요. 그런데 그 수수께끼가 영화 결말부 약 15분 정도에 몰려서, 가장 진부한 방식인 고백으로 풀려요. 앞서 아방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도 나오지만 마카오의 도서관만 오가는 것이 고작이에요.

자사모: 구조의 선택에서 결정적으로 실패했다고 봅니다. 후더닛(whodunit :범인이 누구냐에 초점을 맞춘 미스터리)은 포기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반대급부가 있어야 해요. 한데 <상성>은 그 선택으로 얻은 게 별로 없어요. 왜 그런 무리수를 뒀냐는 거죠. 음냐음냐.

럼주병: 예컨대 초반부에서 양조위가 분한 수사반장이 부하 형사들의 묵인하에 극악한 폭행범을 검거 현장에서 둔기로 패는 장면처럼, 인물의 이면을 드러내는 실마리들을 쌓아갔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자사모: 수사극으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능력도 미흡해요. 비슷한 모티브인 히치콕의 <다이얼 M을 돌려라> 같은 작품을 떠올리면, 상대적으로 서스펜스 제조법이 몹시 초라해요. <무간도>와 <디파티드>를 비교해도 <무간도>쪽이 독창성은 훨씬 강하지만 서스펜스만 비교하면 마틴 스코시즈의 KO 승이죠.

럼주병: <상성>이 <무간도>에 못 미치는 또 한 가지는 두 주인공 사이 관계의 밀도예요. 금성무와 양조위가 서로에게 왜 중요한가, 연민과 유대감의 뿌리가 무엇인가 등등 남자들끼리의 로맨스가 잘 설명되지 못했죠. 그 점이 서스펜스도 떨어뜨렸고요.

자사모: 양조위도 미스캐스팅의 느낌이 있어요. 최초의 악역이라고는 하지만 눈빛이 안 어울리죠. 양조위의 제대로 된 악역을 한번 보고 싶어요. 그게 가능한지 확인할 겸.

럼주병: 가능은 할 것 같아요. 수줍은 연쇄살인범.

자사모: ^^ 수줍게 수줍게 칼과 도끼로 스물일곱명 죽이는? ^^한명 찍고 나서, 수줍어서 웃으며 도리질 한번 치고 또 한명 칼로 쑤시고….

럼주병: 희생자 피부를 벗겨 십자수를 놓아 서랍에 넣고 장터 국수 사먹으러 나오는? --;

자사모: 우리가 더 무섭소. <상성>을 보면서 유위강 감독이 홍콩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실감했어요. 란콰이퐁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고 찍은데다가 홍콩 야경을 사상 처음으로 항공촬영했더라고요.

럼주병: 홍콩이라는 도시를 포함해 이 영화의 모든 ‘배우’는 근사하게 찍혔어요.

자사모: ‘근사’의 의미가 가깝다는 거잖아요? 가깝긴 한데 핵심과 본질에는 도달하지 못한 느낌. -.-

럼주병: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프로덕션과 워너에서 <디파티드>의 작가를 기용해 <상성>도 리메이크한다면서요?

자사모: 그런데 저는 <디파티드>의 디카프리오 연기가 썩 그리 만족스럽진 않았어요(앗, ‘디’ 자로 운이 맞네). <디파티드>의 디카프리오 연기가 썩 디리 만족스럽딘 않았디요. ^0^ <무간도>의 양조위가 깊이의 연기라면 <디파티드>의 디카프리오는 폭의 연기라고 느꼈거든요. 그것이 진품과 모사품의 결정적 느낌 차이를 줬어요. 디카프리오님은 좀더 인생을 아셔야 할 듯. ^^

럼주병: 다음에 만나면 꼭 직언하시길. ^^

자사모: 네, 꼭 딕언할게요!! 그리고 그 대사는 송강호씨가 하셔야 할 듯. “너 디카프리오야? 나 라이프야. ” ^^ 가만, 이러다 정작 ‘직셔너리’ ‘직 앤 제인’, ‘직 체니’ 이러는 거 아닐까요?

럼주병: --;; 고삐 풀린 선배의 시심, 다음주까지 잘 간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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