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6일. 세계에서 가장 길었던 날. 노르망디의 오마하 해변. 기관총탄이 쏟아진다. 수송선 안에 웅크린 몸들은 그 안에서 그대로 시체가 되고, 탄환은 바다 속까지 뚫고 들어가 허우적대는 유기체의 신체를 관통한다. 상륙을 해도 엄폐물 없는 해변에서 신체들은 유린의 대상일 뿐. 총탄이 철모의 외피를 관통하여 내피 속을 회전하고, 그것을 벗어드는 순간 또 다른 총탄이 병사의 머리를 관통한다. 가로 누운 시체들 틈에서 넋이 나간 몸뚱이 하나가 일어나 포격으로 떨어져나간 제 팔을 주워든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40여년 전에 제작된 다른 영화와 비교해보자. 똑같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루었어도 ‘세계에서 가장 길었던 날’을 기억하는 내용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지상 최대의 작전>은 그날을 유럽에서 전세를 역전시킨 ‘위대한 승리’의 날로 기억한다. 때문에 거기에는 승자의 영웅주의만 부각될 뿐이다. 반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그날을 ‘참혹한 희생’의 날로 기억한다. 거기서는 전투의 승자들마저 기관총탄 앞에 갈가리 유린되는 가엾은 고기 덩어리일 뿐이다.
그다지 실감나지 않는 <지상 최대의 작전> 속의 전투장면과 달리,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영화사에 일찍이 없었던 “폭력의 현상학”을 구현한다. 이는 효과를 내는 기술의 차이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기억을 조직하는 미학의 차이다. 가령 <지상 최대의 작전>의 관객은 전투를 ‘밖에서’ 관찰하게 하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장을 객석으로까지 연장해 관객을 불현듯 그날 오마하 해변의 전장에 처하게 만든다. 스필버그에게 실감나는 장면이, 그것도 20분 분량이나 필요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시각에서 촉각으로
베냐민의 말대로 영화는 시각적(visual) 지각을 촉각적(tactile) 지각으로 바꾸어놓는다. 가령 숏들이 서로 충돌하며 빠르게 교체되는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는 시각적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촉각적 충격의 주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그토록 인상적인 것은, 그것이 영화 매체의 고유성을 제대로 드러냈기 때문이 아닐까? 예를 들어 <지상 최대의 작전>이 전투의 장면을 ‘눈’앞에 보여준다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그것의 충격을 관객의 ‘몸’속에 새긴다. 전자가 시각적이라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촉각적이다.
영화이론가 크라카우 역시 에이젠슈테인의 ‘인력의 몽타주’를 연상시키는 어법으로 영화 매체의 촉각성을 지적한다. 영화는 물리적 실재를 그대로 등록하여 마치 자연의 물질적 측면을 원재료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고, 영화는 움직이는 그림이기에 장면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게 잡아놓으며, 영화는 기계의 눈으로 육안으로 보지 못했던 부분까지 드러내기 때문에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것. 그리하여 “영화는 다른 그림들과 달리 주로 관객의 감각을 자극하며, 그가 지성을 사용하기 전에 우선 생리학적으로 그를 건드린다”.
“지성을 사용하기 전에 생리학적으로 건드리는” 영화 매체의 특성은 병사의 체험을 전달하는 데에 사용된다. 오마하 해변에 상륙한 GI들은 총탄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채 곧바로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이 주는 충격에 노출된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지성을 사용해 기관총좌의 위치를 알아내야 하나, 병사들은 금속의 충격으로부터 신체부터 감추기에 급급하다. 엄폐에 성공한 톰 행크스가 거울로 기관총좌의 위치를 알아냄으로써 촉각적 상황은 끝나고, 그제야 돌아온 정신은 비로소 벌어진 상황에 대한 시각적 조망을 확보한다.
지각의 현상학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에 따르면, 지각의 주체는 정신이 아니라 살(chair)이다. 르네상스의 원근법은 ‘정신의 눈’으로 본 세계를 보여주나, 우리 눈에 비치는 세계는 실은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왜? 우리는 세계를 ‘육체의 눈’으로, 즉 안구라는 신체기관을 가지고 보기 때문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동요하는 카메라는 지각의 현상학을 실천한다. 그로써 지각의 주체가 예지계에서 굽어보는 정신이 아니라 끔찍한 현상계에 묶인 육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스필버그의 카메라는 상황을 ‘외적으로’ 관찰하는 눈이 아니라 그 상황에 내적으로 처한 자의 눈이다. 상륙의 순간을 담은 로버트 카파의 사진은 리히터의 작품처럼 흐릿하다. 외부의 관찰자가 아니라 병사와 똑같이 상황의 내부에 처한 자로서 찍었기 때문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숏의 전환은 숨가쁘고, 카메라는 요동친다. 쏟아지는 총탄의 세례를 신체가 지각하는 세계는 그렇게 심하게 흔들리는 파편적 영상의 조각들로 나타나지 않을까?
카메라는 관객에게 지옥에서 고통받는 병사들의 육체를 입힌다. 마지막 전투에서 톰 행크스는 포격으로 청력을 잃는다. 순간 스피커에서 갑자기 사운드가 사라진다. 이로써 관객 역시 직접 포격을 당한 신체처럼 한동안 귀가 멍해진다. 그보다 더 상처를 주는 장면은 두 병사의 격투. 독일 병사의 칼이 손의 저항을 이기고 서서히 미군 병사의 심장으로 파고든다. 이때 관객은 제 심장에 칼이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독일 병사가 제발 죽어달라고 달래며 미군 병사의 귀에 속삭인다. “안 아플 거야. 곧 끝날 거야.”
성조기 휘날리며
영화 매체의 촉각성으로 상처를 주어 역사를 트라우마로 기억하게 하는 것. 거기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성취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할리우드영화의 촌스러움은 존재한다. 촉각적 효과로 전쟁을 상처로 체험하게 하는 것은 철저한 반전주의 메시지에 적에 적합할 것이다. 하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단 한명을 위해 여덟명의 병사가 희생하는 이야기로 개인을 존중한다는 미국식 휴머니즘을 선전하고, 마지막에 성조기를 휘날리는 장면은 이 모든 성취를 미국식 애국주의의 좁은 틀 안에 가두어놓는다.
태극기 휘날리는 영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형제’와 ‘구하기’라는 모티브, 포로의 배반이라는 모티브, 톰 행크스의 청력 상실과 장동건의 감각 상실, 군인 묘지와 유해 발굴의 평행.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적 상황에 맞춰 번안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다. 후자가 전쟁의 희생자를 공적으로 기념한다면, 전자는 그를 사적으로 기념한다. 여기서 개인을 중시하는 미국식 휴머니즘은 가족을 중시하는 한국적 휴머니즘으로 변용되고, 미국식 애국주의의 정신은 한국적 가족주의의 형제애로 번안된다.
<태극기 휘날리며> 역시 매우 촉각적이다. 특수효과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맞먹을지 모른다. 하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신체의 현상학을 역사의 상처를 기억하게 하는 장치로 사용한다면,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유감스럽게도 그 요란한 촉각적 효과가 어디에 소용되는지 불분명하다. 거기서 전투장면은 그저 실감만 날 뿐이다. 전략없이 실천되는 현상학은 신체에 무의미한 자극만 주며, 기술의 현시나 볼거리의 제공에 그친다. 거대한 붉은 깃발이 강렬한 촉각적 효과로 신경을 자극하나, 이 역시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을 너무 강하게 연상시킨다.
자극으로서 영화
영화를 현실의 재현으로 보고 그것의 조형미를 평가할 수가 있다. 이때 영화는 기호론적으로 도상(icon)이 된다. 반면 영화에 구현된 메시지에 주목하여 그것을 텍스트의 시각적 번역으로 읽을 수 있다. 이 경우 영화는 기호론적으로 상징(symbol)이 된다. 하지만 형식이냐 내용이냐의 이분법을 넘어, 영화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도 있지 않을까? 가령 영화를 무엇보다 신체에 가해지는 일종의 ‘자극’으로 보는 것이다. 이 경우 영화의 기호적 본질은 지표(index)가 될 것이다.
형식주의자라면 영화를 ‘조형적 구조물’로, 내용주의 비평은 영화를 ‘문학적 구조물’로 간주할 것이다. 하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촉각적 본질은 조형미의 분석이나 메시지의 해석으로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을 포착하려 할 때 비평은 신체의 현상학이 된다. 영화는 조형미를 갖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관객의 신체 자극을 준다. 영화를 인덱스로 바라볼 때, 비평은 영화를 자기 완결적인 ‘작품’이 아니라, 자극과 반응의 ‘연쇄’로 간주하게 된다. 여기서 비평의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자극의 ‘강도’(intensity)다.
가령 <블랙 호크 다운>에 묘사된 전투의 강도를 생각해보라. 그것은 관객의 신체에 거의 ‘쇼크’에 가까운 자극을 가하고, 그로써 관객은 한동안 실제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처럼 ‘전쟁증후군’에 시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