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續 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클로저> - 배우 유아인
2007-06-08
나도 사랑을 묻고 싶다

‘인생’이란 말을 입에 담는 것조차 어색하고 아직 영화가 뭔지도 모르는 스물두살 풋내기에게 ‘내 인생의 영화’라니, 거창하기 짝이 없다. 몇가지 영화를 나열해보고 이리저리 분류해 어떤 영화를 이야기 할까, 무엇이 유아인과 어울리는 영화일까 고민 끝에 결정한 영화란 것도 지독한 사랑영화인지라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어떤 코멘트로 아버지의 양복을 몰래 훔쳐 입은 어색함을 변명해야 할지도 한참을 걱정해야 했다. 어리석게 말이다.

<클로저>는 스무살이 되고 나선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18세 관람가’ 영화였다. 하지만 허락된 나이가 된 그때에도 영화의 무게를 감당키는 어려웠고 열렬한 사랑을 하던 스물한살에 우연히 케이블TV의 영화 채널에서 다시 보았을 때도 그 막막함의 무게에 할 말을 잃었었고, 원고를 쓰려고 다시 본 오늘은 더 가까이 다가온 현실의 무게에 눈물을 떨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섹스에 대한 노골적인 대사와 내털리 포트먼의 숨넘어가는 스트립쇼 장면을 삭제하더라도 ‘18세 관람가’딱지가 붙는 게 마땅할지 모르겠다.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한 네 남녀의 사랑은 소년의 마음으로 품었던 아른한 환상을 산산조각냈고 그것은 사랑에 대한 회의와 두려움만을 남겼다. 이제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마이크 니콜스 감독은 순간과 그 순간의 배우 뒤에서 냉소의 칼을 들이밀고 예리한 칼은 그 모든 것을 관통하여 관객에게까지 닿는 것 같다. 상처 가득한 소년의 마음결에 생채기를 더하고 그것이 현실이라며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다.

“Hello, stranger.” 낯선 남자에게 건내는 앨리스(내털리 포트먼)의 인사다. 4년의 세월이 지나도 그녀에게 댄(주드 로)은 낯선 남자였고 그 사이에 겪은 또 다른 남녀(줄리아 로버츠, 클리브 오언)와의 복잡한 관계에서 배신하며 이별하고 재회하지만 그들은 친밀한 타인일 뿐이고 그 관계에서 진실은 아니, 더 구체적으로 진실을 담은 ‘말’은 사랑과 공존하지 못한다. 조금 더 비약하자면 <클로저>가 말하는 사랑은 흥미진진한 가면극, 혹은 사기극일 뿐이다.

영화 전체의 오프닝과 엔딩에 삽입된 데미안 라이스의 7lt;Blower’s Daughter>란 곡에선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I can’t take my eyes off you)는 가사가 처연하게 반복된다. 영화는 분절된 시간을 통해서 네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의 포인트만을 보여주며, 포스터에서처럼 그들은 반쪽 눈으로 상대의 육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진실에서 눈을 떼지 못하지만 만남과 헤어짐 사이의 가장 중요한 것들은 보지 못한다. 누군가는 진실로 인해 떠나고, 누군가는 아름다운 거짓을 원하며 누군가는 또 육체에 집착하여 진실을 보지 못하고, 누군가는 그 모든 것을 관조하는 듯하지만 결국 그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습지만 아직 지난 사랑의 독한 열기가 가시지 않아서 이 잔혹한(?) 멜로영화가 내 인생의 영화로 꼽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열매는 고사하고 이제 막 몇번의 꽃을 떨군 내게도 그것이 바로 예쁘게 포장되고 심지어는 리본 장식으로 마감된 ‘사랑’의 이면이자 생생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진실 또한 하나의 가면이자 수단일 뿐 그것을 지탱하는 근본이 되지는 못한다. 아니, 오히려 독이란 표현이 더 잘 맞겠다.

신인 배우에겐 인터뷰마다 빠지지 않는 질문이 바로 “어떤 역할을 해보고 싶으냐”는 것이다. 사실 별로 좋아하는 질문도 아니고, 내가 그리는 그림 또한 워낙 추상적이라 쉽게 대답하지 못했지만 요즘엔 “슬슬 본격적인 사랑 얘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하고 반문한다. 어린 나이라 여전히 사랑을 얘기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사랑을 빼놓고 청춘을 얘기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니 말이다. 그것이 거침없고 열정으로 가득한 것이건, 비틀린 냉정을 품은 것이건 간에 <클로저>의 빛나는 별 같은 배우들보다 더 생생하고 지독한 눈으로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다. 사랑을 묻고 싶다.

유아인/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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