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도시적인 느낌의 임꺽정을 만들고 싶었다
2007-06-08
글 : 강병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영화 <황진이>의 ‘놈이’ 유지태

<황진이>의 놈이를 유지태가 연기한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동명 원작의 작가인 홍석중은 놈이의 모습을 임꺽정으로 묘사한다. “뼈마디가 굵어서 엄장이 대단해 보이는데 부드러운 살맛이라고는 꼬물만큼도 없어서 온통 울근불근한 뼈와 힘줄과 힘살로만 만들어진 사람 같았다. 이목구비의 선들이 어찌나 굵고 날카로운지 얼핏 그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해도 부지불식간에 두려움과 비슷한 존경이 자아올랐다.” 하지만 어디 유지태가 그런 인물이던가. 큰 키에 무용으로 다져진 그의 몸매는 매끈한 뼈마디와 부드러운 힘살로만 이루어진 듯했고, 선이 없는 이목구비는 편안한 미소를 자아내 데뷔 초기의 그를 스타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내츄럴시티> <거울 속으로>에서 보여준 강한 남성상이나 <뚝방전설> <올드보이> 등에서 연기한 악역마저도 유지태가 간직한 태는 그대로 돋보였을 정도다. 지난 5월25일 공개한 <황진이>에서 등장한 유지태의 놈이 또한 그만의 태를 간직한 남자였다. <봄날은 간다>의 상우 이후 줄곧 관객의 로맨틱한 기대와는 다른 선택을 해온 그에게 또 다른 변화의 욕심은 없었던 것일까. “영화배우에게 변신이라는 것은 3단변신로봇처럼 전혀 다른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 안의 것을 뽑아내야지, 남의 연기를 하면 안 되는 거다.” 긴 머리를 자르고 공들여 붙인 근육을 줄여가며 놈이에서 벗어난 유지태는 다소 피곤한 눈치였다. 지난 5월27일에는 연극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 공연을 끝냈고 바로 이어 <황진이>의 금강산 시사회에 참석해야 했던 터라 이제야 비로소 피로를 즐기게 된 듯 보였다. “일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원래 일을 많이 벌이는 스타일이어서 그렇다. (웃음)” 우정출연 작품을 포함해 18번째 작품의 개봉을 기다리는 그를 만나 <황진이>의 놈이와 요즘 벌이는 일들에 대해 물어보았다.

-영화를 보니 생각보다 비중이 작은 것 같더라. 주위 사람들이 뭐라 하지는 않던가.
=사람들은 배역보다 분량을 많이 생각하더라. 어떤 작가는 앞으로 70% 이상 나오는 영화 아니면 출연하지 말라고 하더라. 하지만 작품이 좋으면 주연이든 조연이든 가릴 건 아닌 것 같다. 그걸 가리라고 하는 건 스타와 배우를 헷갈리는 거지.

-장윤현 감독은 어떤 말로 놈이를 권유하던가.
=사실 내가 먼저 감독님의 작품을 찾았다. 장윤현의 감독님의 <접속>과 <텔미썸딩>을 인상 깊게 봤다. <썸>도 매우 아이디어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독님의 이후 영화에 거는 기대가 있었고, 매니저한테 장감독님은 요즘 뭘 하시냐고 물어봤다. 그런데 <황진이>를 한다는 거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출연할 수 있는 역할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왜 없겠다고 생각했나.
=내가 아는 황진이는 수많은 남자에게 둘러싸인 여자였다. 내가 배역을 맡아봤자 그런 남자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물론 서화담 같은 배역이라면 했겠지. 하지만 내가 그런 나이도 아니고. 그래서 그냥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몇 개월 지나니까 나한테 <황진이> 시나리오를 보냈다고 하더라. 시나리오를 읽어본 뒤에야 소설 <황진이>인 줄 알았다. 통독으로 3번 정도 읽어본 뒤 하겠다고 했다.

-원작의 놈이는 글만 읽어봐도 우악스러운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영화의 놈이는 세련된 남자더라.
=내가 임꺽정 같은 모습을 보여주면 어색할 거라 생각했다. 임꺽정 하면 생각나는 배우들이 있지 않나. 정흥채 선배나 이대근 선생님 같은. 그래서 나만이 할 수 있는 놈이를 만들고 싶었다. 물론 운동을 해서 몸에 근육은 키웠지만, 그에 더해서 도시적인 느낌의 임꺽정을 만들고 싶었다.

-어떤 면에서 놈이는 <나쁜 남자>의 한기 같기도 했다. “내가 아씨에게 갈 수 없다면, 아씨를 내 곁으로 오게 만들려고 했다”는 대사도 그렇고.
=<나쁜 남자>와 연관을 맺자면 놈이는 매우 극악무도한 놈이 될 거다. 놈이는 단지 황진이를 내 여자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만 하다가 급한 마음에 계략을 꾸민 거다. 그러다 X된 거지. (웃음)

-단편영화 감독이기도 한데, 콘티를 보면서 연출해보고 싶거나 바꿔보고 싶은 장면은 없었나.
=<황진이>는 글 콘티가 많아서 상상으로 풀어가는 것이 많았다. <황진이>를 보면서 딱히 바꿔보고 싶은 건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현재를 다룬 영화를 많이 해서 빠른 템포의 퓨전사극을 많이 생각했는데, 흐름에 맞춰 편집이 잘된 것 같다.

-멜로영화인데 왜 황진이가 놈이를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미흡해 보인다.
=원작에서는 황진이가 자신의 운명적인 사랑이 놈이였다는 걸 깨닫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소설을 영화화하는 작업에서는 당연히 그런 걸 생략하는 과정이 있게 마련이다. 영화에서는 그랬다는 설정이 있는 것이고 세부적인 것을 모두 다 설명해주면 장황해지기 때문에 축약한 것으로 생각한다. 나 역시 이미 사랑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쉬운 건 없다.

-지금까지 맡았던 캐릭터 중 놈이는 유일하게 끝까지 강한 역할이 아닐까 싶었다. 몸을 던져 사랑을 지키면서 의리도 지키지 않나. 그런 캐릭터에 대한 쾌감은 없었나.
=그런 마초이즘은 내게 없다. 남자인 척하는 사람들은 재수없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남자다움과 객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항상 자기가 지휘하려 들고 군림하고 싶어하는 남자들은 지금 시대에서는 환영받지 못하게 마련이다. 애들도 아니고. 내가 맞든 때리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싸우면 개쪽인 거지. 남자의 가장 큰 미덕은 참는 거다. (웃음)

-<가을로> 촬영 때는 연극 <육분의 륙>과 병행하느라 병에 걸리기도 했다. 이번에도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를 같이 준비하지 않았나.
=영화 홍보하는 시기와 공연 일정이 겹쳐서 짜증이 많이 났다. 심지어 공연을 한번 망치기도 했고. 또 하필 그날이 후배들이 와서 본 날이어서 더 짜증이 났었다.

-공연이 끝나서 아쉬운 마음보다도 후련한 마음이 더 크겠다.
=그런 것보다도 연극과 영화의 경계가 더 많이 허물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우리나라는 연극하는 사람, 영화하는 사람, 드라마하는 사람들이 좁은 바닥에서 경계를 짓고 있다. 물론 나는 10년 동안 영화만 해서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더 편하긴 하다. 아직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건 익숙지 않다. 이왕이면 영화인 유지태로 남고 싶은 생각도 있다. 하지만 연극은 삶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메인스트림의 배우가 연극에 출연하는 것을 안 좋게 보는 시선도 있다.
=어떤 연극배우는 나한테 대놓고 연극하지 말라더라. (웃음) 내가 마음에 안 들었겠지. 사실 나도 우리나라 연극판이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 연극판에는 아직도 술먹고 싸우면서 스스로 순수예술을 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려는 경향이 있다.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왜 자꾸만 싸우려고 하는지. 나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는데. 우리나라를 벗어나서 보면 더스틴 호프먼이나 하비카이틀도 무대 에너지를 필요로 할 때는 연극을 한다. 우리도 그들처럼 좀더 유연한 사고방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연극을 하면서 부대끼던 일이 많았나보다.
=나는 한창 스타로 각인되던 시절에 시작해서 편견이 특히 심하다. 연극은 배우들끼리 만드는 부분이 크다. 그런데 그들 안에서 서로 선입견을 갖고 오해하고 삐치는 면이 많아서 아쉬울 때가 있었다. 게다가 내가 잘 까부는 것도 아니고,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서. 나도 좋은 인적 관계를 유지하고 싶기는 한데, 아니면 마는 거지 뭐. 아쉬울 게 뭐가 있나.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는 유무비의 두 번째 창작연극이다. 유무비는 어떤 회사인가. 영화도 만들고 카메라 렌털도 한다던데.
=짐 자무시같이 독립영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에 차린 회사다. 영화로 만들려던 시놉을 연극으로 개발하면서 개인적 기량을 키우는 기회가 될 것 같기도 했다. 또 영화의 질적인 면에 뭐가 가장 중요한가 생각해보니 카메라더라. 디지털카메라로도 많이 만들지만, 나는 필름에 익숙한 편이어서 카메라를 구입했다. 뜻을 같이하는 촬영감독이 운영을 해주는 조건으로…. 아, 조건이 아니지. 어차피 내 건데. (웃음) 아무튼 마냥 썩힐 수는 없어서 렌털도 같이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괜한 짓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욕만 진탕 먹었지 뭐.

-유무비에는 어떤 뜻이 있는 건가.
=있을 유, 없을 무, 날 비다. 있거나 말거나, 뜨거나 말거나란 건데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자비로 회사를 운영하는 게 어렵지는 않나.
=쉽지는 않다. 이번에도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는 적자를 봤다. 하지만 내가 워낙 돈을 잘 안 쓰는 편이어서. 난 지금까지 외제차도 한번 못 타봤다.

-그래도 일을 벌이는 걸 보면 욕심이 많아 보인다.
=글쎄…. 옛날에도 바빴고 지금도 바쁘긴 마찬가지인데, 단지 옛날에는 돈이 되는 일로 바빴다면 지금은 돈이 안 되는 일로 바쁜 거다. (웃음) 한편으로는 내 스스로 초라해지기 싫어서 그런 것도 같고.

-과거에는 정말 욕심없는 소년의 이미지였는데.
=그때는 CF를 찍든, 화보를 찍든 무조건 웃어달라던 때였으니까. 그때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 내가 자꾸 똑같은 웃음을 지어야 하나. 왜 다양한 모습으로 연출하려 하지 않는 걸까. 물론 지금은 이해가 간다. 지금이라면 무조건 활기차게 웃어주겠지. (웃음)

-그래서 그동안 스스로 웃음을 지우는 캐릭터를 맡으려 했던 건가.
=내가 너무 한계적인 선택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배우 나름대로 영화에 대한 판타지가 있지 않나. 알 파치노처럼 독한 연기도 해보고 싶은 것 말이다. 나는 아직 젊은데도 자꾸 같은 것만 시키려고 하니까 재미가 없었던 거지. 물론 웃는 걸로 다 때웠다면 돈이야 많이 벌었겠지만.

-회사도 운영하는데, 돈에 대한 욕심은 없나.
=요즘은 몇억원이 우습게 보이지만, 그때만 해도 억대의 돈은 상상도 못하던 금액이었다. 나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 나이 또래 사람들에게 몇억원이란 돈은 상상하기 힘든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렇게 상상도 못하는 돈을 벌면서 내가 왜 압박을 받아야 하나. 돈에 구애받지 않고 내 꿈을 더 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도전하고 투자하는 게 더 멋지게 살 수 있는 길처럼 보이기도 했고.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는 선택을 자주했기 때문인지, 유지태란 배우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으로 기억되는 <동감>의 지인이 필모그래피에서는 오히려 가장 튀어 보인다.
=이번 연극에서는 지인처럼 귀여운 척을 많이 했다. 연출자가 영화에서는 해보지 않은 걸 시도해보라고 하더라. 그런데 나는 성정에 어두운 면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재밌게 하는 걸 경직되게 보는 게 있었다. 그래서 코미디도 쉽게 못했던 것이고. 하지만 지금은 상당히 바뀐 게 있다. 이제는 로베르토 베니니처럼 사람들이 나를 보고 인생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가장 좋다고 하더라. (웃음) 그만큼 사람들은 내가 어떤 강한 감정을 드러내려는 것보다는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어울린다고 보는 것 같다.

-과거 인터뷰 기사를 보면 항상 자신이 부족한 것이 많다고 했다. 왜 그렇게 자학하나.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그게 나의 에너지일 수도 있다. 정물화가인 세잔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흔히 사과에는 3개의 사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과, 뉴턴의 사과, 그리고 세잔의 사과가 있다고 하지 않나. 그 정도로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화가였다. 하지만 그는 항상 나처럼 그림 못 그리는 사람도 없다고 말하곤 했다. 남들이 들으면 뒤집어지는 발언이지. (웃음) 그처럼 자학하는 예술가가 있는 가하면 잭슨 폴록처럼 오만한 예술가도 있는 것이다. 자학하는 것은 분명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지만 매너리즘에 빠질 틈을 주지 않는 장점도 있다. 자신감을 잃는 만큼 겸손해질 수도 있고.

-<봄날은 간다>가 개봉할 당시에는 자신이 아직 어리다고 했었다. 그런 자학이 이제는 어른을 만들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책임감이 더 커진 게 있다. 사실 나는 아버지의 부재 때문에 가정의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20대부터 있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좋은 남자,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그때가 되면 충분한 경제적 기반도 있어야 하겠고 원하는 일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하는 등의 고민들이 많았다. 쉽게 말해 쓸데없는 생각이 많았던 거지. (웃음)

-그렇다면 지금은 예전보다 조금 더 단순해진 건가.
=아까도 말했지만 상상도 못하는 돈을 벌고 있는데, 액수에 차이가 난들 내게 큰 영향이 있을 거라고 보지는 않는다. 내가 사치하지 않고, 우리 어머니도 그러시면 지금의 행복은 충분히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외 나머지 고민들은 오로지 작품에 열중하고 싶다.

-영화도 개봉하고, 연극 공연도 마무리했다. 이제는 또 영화연출에 열중할 때가 아닌가 싶다.
=연출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은 콘티를 만들고 있는데, 한 남자가 자기도 모르게 기억 속에 있는 첫사랑의 집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다. 차 안에서 모든 게 이루어지는 영화다. 올림픽대로를 주행하던 한 남자가 어떤 여고생을 떠올리는데, 관객이 보면 원조교제나 불륜처럼 보이도록 연출할 계획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것이 지금의 기억이 아닌 과거의 추억이었던 것이지. 그리고 남자는 자기 집으로 가던 길에서 핸들을 꺾어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단편의 영역에서는 어울릴 수 있는 이야기일 것 같았다.

-장편영화를 연출할 생각은 없나.
=독립장편영화로 계획하고 있다. <육분의 륙>이나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 등 연극으로 했던 작품을 영화화할 계획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재미있을 것 같다.

-갈수록 욕심이 많아지는 것 아닌가.
=욕심이 많은 건 문제가 아니다. 돈 되는 일은 안 하고 돈 쓰는 일만 하니까 문제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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