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100%의 연애영화’였다. 그 영화를 ‘발견’한 4만5천여명의 팬들에게는 그랬다. 입소문을 타고 조용히 관객을 끌어모으던 영화는 결국 재개봉되었고, <금발의 초원> 같은 이누도 잇신의 초기작들까지 한국에 개봉되는 일종의 사건으로 이어졌다. <황색눈물>의 개봉을 앞두고 짚어보는 이누도 잇신 월드. 어떤 영화들이, 어떤 요소가 한국 팬들을 사로잡은 것일까.
ㄱ. <금발의 초원>
18살의 나리스(이케와키 치즈루)는 치매 노인의 수발을 드는 가사 도우미. 그녀의 고객은 노인 아유무(이세야 유스케)다. 아유무는 나리스를 환상으로만 가능했던 여인, 자신의 이상형 여인이라고 여긴다. 그는 자신의 마돈나가 밥을 차려주고 빨래를 해주는 데 감격하는데 정작 나리스는 피가 섞이지 않은 의붓동생 마루오(마쓰오 마사토시)에 대한 사랑으로 상심에 젖는다. 사랑을 감추기만 하던 나리스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구애하는 아유무를 보면서 자신이 불행이 무서워 행복에서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ㄴ. 노인
이누도 잇신이 생각하는 일본은, 딱 노인이다. 아이 같은 노인. 생각해보면 <황색눈물>은 1960년대의 청춘을 그리는데, 그 주인공들을 현재 시점에서 생각하면 노인들이다. 지금 나이든 이들의 청춘, 그들의 꿈을 그리고 싶다는 게 이누도 잇신의 말이다. “일본에 노인과 젊은이가 있다면, 오히려 노인이 젊은 일본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일본은 너무 늙어버렸다. 게다가 노인으로서 존재를 증명하려고 발악하는 것 같다. 꿈과 실패, 좌절이 있는, 지금의 일본이 포기한 부분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ㄷ. <둘이서 이야기하다>
이누도 잇신이 만든 <금붕어의 일생>이라는 애니메이션은 일본의 맥주회사 기린의 콘테스트에서 그랑프리를 받았다. 그 상금으로 만든 영화가 바로 <둘이서 이야기하다>. <둘이서 이야기하다>는 ‘투나이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두 여성 만담가의 일과를 그린다. 이누도 잇신은 이 영화로 일본감독협회 신인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선댄스영화제에서도 수상한다. 광고감독 이누도 잇신이 영화감독으로 거듭나는 경계에 있는 영화.
ㄹ. 로맨스, 혹은 순정
이누도 잇신의 등장인물들은 쉽지 않은 연애를 하는 데 선수다. <금발의 초원>에서 사랑의 작대기는 늘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대상에게 향하는데, 그 간극에서 오히려 순정의 판타지가 살아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연애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청춘의 절정과도 같은 사건이다. 이누도 잇신의 인물들은 때로 시니컬하고 때로 우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정을 지켜가는 사람들이다. 소녀만화에서 영향을 받은 그의 세계관이 도드라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ㅁ. 메종 드 히미코
이누도 잇신의 2005년 작품.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떠난 게이 아버지를 돌보게 된 사오리(시바시키 고)의 이야기다. 어머니가 투병생활하는 동안 진 빚으로 고생하는 사오리에게 잘생긴 하루히코(오다기리 조)가 찾아온다. 하루히코는 사오리의 아버지의 애인이다. 아버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던 사오리는 돈 때문에 아버지를 간병하는 일을 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삶을 찬찬히 이해하게 된다. 참고로, <메종 드 히미코>에서 다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은, 그 시절에 그런 장면을 찍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바보스럽고, 시시한 것들을 흔히 부정적인 투로 말하는데 나는 그것도 인간의 일부라 생각하고, 그 어리석음에도 애착을 갖는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가 그렇듯이.”
ㅂ. <비잔>
2004년 12월에 발간돼 10만부 이상 판매된 사다 마사시의 소설을 영화화했다. 말기암에 걸린 어머니(미야모토 노부코)와 간병을 위해 고향에 내려온 딸 사키코(마쓰시마 나나코) 이야기. 그 사이로 사키코와 의사 데라사와(오사와 다카오)의 사랑이 펼쳐진다. 어머니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사키코는 어머니가 죽었다고만 했던 아버지를 찾아나선다. 무대인 도쿠시마의 신록이 풍부한 여름을 배경으로 삶과 죽음에 관해 담담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본에서는 <도쿄타워>의 모녀판이라는 평이 있었다.
ㅅ. <사랑과 죽음을 응시하며>
이누도 잇신이 만든 TV드라마. 연골육종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린 미치코(히로스에 료코)와 마코토(구사나기 쓰요시)의 작지만 큰 사랑이야기다. 마코토와 미치코는 같은 병원에 입원한 환자다. 둘이 나이도 비슷하고 똑같이 한신 팬임을 알게 된 미치코는 퇴원하는 마코토에게 펜팔을 제안한다. 이렇게 두 사람이 4년간, 38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는 순수한 사랑이야기.
ㅇ. <우리개 이야기>
개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가득 담은 영화. 개를 둘러싼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등장하는데, 보통 사랑과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주인의 짝사랑을 지켜보다가 스스로 사랑에 빠지는 개, 자기에게 팥빵을 아낌없이 주었던 친구를 평생 기다리는 개, 그리고 주인이 아이 때부터 평생을 함께 보내며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개. 인간보다 수명이 짧기에 먼저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 때문에 어리거나 젊은 주인들에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까지 가르쳐준다.
ㅈ.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한국의 이누도 잇신 팬들 사이에 이누도 잇신 월드의 시작점이자 쓰마부키 사토시 신드롬의 시작점이기도 한 영화. 그저 달큰할 수 있었던 사랑이야기를 날카롭고 예민하게 보여주는 영화. 쾌활한 대학생 츠네오(쓰마부키 사토시)는 어느 날 새벽 언덕길을 달려 내려오는 유모차와 마주친다. 그 안에는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또래 소녀가 타고 있었다. 소녀의 본명은 쿠미코, 하지만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에 푹 빠진 그녀는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을 본떠 자신을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라고 부른다. 츠네오는 이 독특하고 고집 센 소녀에게 점점 사랑을 느끼고 몇번의 망설임과 헤어짐을 거치다 마침내 조제와 동거를 시작한다. 하루키식으로 말하면 ‘100%의 연애영화’. 열광적인 팬의 지지로 1년 뒤 재개봉하기도 했다.
ㅊ. 치즈루, 이케와키
<금발의 초원>과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출연한 이케와키 치즈루와 이누도 잇신의 인연은 그녀가 14살이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케와키가 14살이었을 때 CF를 찍으면서 처음 만나, 이후 각자의 두 번째 장편 극영화 <금발의 초원>에서 두 번째 호흡을 맞춘 것. “네가 가진 지금의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내줄 수 있는 영화를 해보자”는 게 그녀를 캐스팅하던 당시 이누도 잇신 감독이 했던 이야기. <고양이의 보은>에는 목소리 출연을 했으며, <오늘의 사건사고> <누구를 위해> <스트로베리 쇼트케익> 같은 영화들에 출연했다.
ㅋ. 카메라
이누도 잇신의 첫 번째 카메라는 중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생인 그는 중학교 때부터 8mm 카메라를 들고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이누도 잇신은 영화감독이 아닌 광고감독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딘다. 광고감독을 하던 그는 33살이 되어서야 영화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ㅌ. <터치>
아다치 미쓰루의 걸작 만화 <터치>를 영화화했다. 81년부터 연재된 <터치>는 소녀들이 보는 소년만화로 한 시대를 풍미한 걸작. “소녀만화가 일상을 재미있게 그린다면, 소년만화는 영웅이 등장하는 비일상을 그리는 것이 많다. 아다치 미쓰루는 일상을 소년만화에 끌어들였다”는 게 이누도 잇신의 말이다. 쌍둥이 형제 우에스기 타츠야(사이토 쇼타)와 카즈야(사이토 게이타), 그리고 이웃의 미나미(나가사와 마사미)는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로 같은 메이세이고등학교에 다닌다. 야구부 에이스로 활동하는 동생 카즈야는 공부도 잘해서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귀여운 야구부 매니저 미나미와 잘 어울리는 한쌍으로 인정받지만 타츠야는 말썽꾸러기로 찍힌 몸이다. 카즈야는 미나미를 좋아하고, 타츠야도 미나미를 좋아하지만 동생을 생각해서 내색하지 않는다. 미나미는 카즈야와 사귀지만 속으로는 타츠야에게 끌린다. 이누도 잇신은 <메종 드 히미코>를 막 끝내고 피곤한 상태였지만,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나가사와 마사미가 캐스팅되었다는 말에 당장 수락했다고 한다.
ㅍ. 피아영화제
이누도 잇신은 17살 때 이미 단편영화 <기분을 바꿔볼까?>란 작품으로 피아필름페스티벌에서 입선했다. 이때의 경험은 이누도 잇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가 피아영화제에서 구로사와 기요시, <환생>을 만든 시오타 아키히코 등과 만나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바로 영화를 업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ㅎ. <황색눈물>
고도 경제성장을 계속하며 한껏 들떠 있는 1960년대 초의 도쿄를 무대로 한 청춘들의 이야기. <금발의 초원>이 그랬던 것처럼 <황색눈물>도 만화가 원작이다. 이누도 잇신의 영화에는 소녀만화에서 받은 영향이 압도적인데, 이들은 주로 49년조라 불리는 작가군의 작품이다. 49년조는 1970년대 등장한 49년생 작가들의 집단을 말한다. 일본에서 소녀만화는 남자들이 읽을 수 없는, 읽지 않는 장르다. 하지만 49년조의 작품들은 남자들이 숨어서 볼 정도로 임팩트가 대단했다. 보통 소년만화가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계기로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점프를 한다면, 소녀만화는 일상은 일상으로 계속 이어지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렇다 할 사건은 없지만 이야기는 신선하고 재미있다. 이누도 잇신의 정서와 맞닿은 부분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