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위반의 욕망으로 가득찬 블록버스터
2007-06-14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할리우드가 캠프적 감수성을 받아들여 만든 획기적 기획물 <캐리비안의 해적>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주인공 잭 스패로우에 관한 풍문 중 흥미로운 점 한 가지는 이 캐릭터가 게이일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2편의 라스트신에서 엘리자베스가 키스로 잭을 유혹하고 거기에 속아 넘어간 잭이 돛대에 묶여 바다 괴물 크라켄의 먹이가 되면서, 영화는 결국 스스로 유도했던 그 소문을 교묘하게 다시 거둬들이며 3편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유희와 해명에도 불구하고 잭은 여전히 모호하고 탄력적인 캐릭터다.

“잭은 누구 편이죠?”라고 물었던 자가 “현재 상황에서 말인가요?”라고 반문받는 일은 당연하며, “그는 운이 좋은 걸까요, 명석한 걸까요?”라는 질문에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있는 방도란 없다. 당신의 싸움은 공정치 않다고 윌이 불평할 때 잭은 “내게 공정한 싸움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아”라고 말하거나, 누군가 그럴싸한 전통을 강조할 때 “나는 전통을 좋아하지 않아”라고 못박는다. 그를 선인과 악인 중 어느 하나로 이분법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규범적 전통 안에서 해석하는 건 무용한 일이다. 잭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건 위반의 명수이고 모든 고매해 보이는 것들의 반대편에 선 대표자이며 그런 짓을 공공연히 일삼는 이 영화의 해적들 중에서도 가장 괴이한 자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공인된 가치가 아니라 이 거친 바다의 모험을 헤쳐갈 때 필요한 자신만의 고집스런 취향과 스타일의 통용이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의의와 가치 내지는 규약과 율법에 뒷짐 진 이 주인공의 면면이 매우 스타일리시하게 보이는 것과 그가 한때 게이라고 알려졌던 것은 결코 우연히 겹친 일이 아니다.

스타일의 신봉자 오스카 와일드는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에서 “사람을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눈다는 것은 우스운 짓이다. 매력적인 사람과 지루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런 점에서 잭은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채 지루하지 않은 매력남이다. 그러므로 한편 오스카 와일드의 그 말을 빌려 쓰며 58개의 단장으로 ‘캠프(camp)에 관한 단상’을 작성한 수잔 손택의 의견이 지금 상기된다면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잭을 위시한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탄력성은 다분히 캠프적 감수성의 어떤 정교한 흉내 내지는 기획물로서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이 시리즈가 디즈니랜드 놀이기구에 서사적 생명력을 불어넣어 탄생한 것이라는 사실도 결국에는 덧붙여야 할 것이다. 캠프적 감수성의 상업적 전유와 디즈니랜드 놀이기구의 서사화 혹은 그 둘 사이의 결합은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 긴요한 요체가 된다.

<캐리비안의 해적>과 <스타워즈> <반지의 제왕>의 결정적 차이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말하기 위해 지금 두편의 다른 블록버스터 시리즈 <스타워즈>와 <반지의 제왕>을 꼽는 게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실은 그렇지 않다. <스타워즈>가 마침내 완성해낸 것은 우주적 역사이며 위대한 제다이들에 관한 신화성이다. 잭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주인공 윌과 엘리자베스로 무게를 옮겨볼 때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신화 역시 숨겨진 해적의 후계자가 혹은 그를 사랑하고 해적을 동경한 여인이 어떻게 함께 평범함을 깨고 위대한 해적의 서열에 들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반면 <반지의 제왕>을 말할 때 잘 지적되지 않는 특징, 그건 반지원정대라는 육체적으로 뛰어난 전사들 사이에 낀 힘없는 꼬마가 어떻게 스스로 고양된 정신적 수행자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특히 서사의 방향을 두 갈래로 나눠 한쪽은 원정대의 육체적 모험으로 한쪽은 프로도의 정신적 모험으로 나누어 진행시킨 것이 <반지의 제왕> 3편의 내용이며, 이 작품은 우리를 장대한 신화의 초입으로 안내한 1편과 육중한 CG 스펙터클을 보여준 2편보다 훨씬 앞서 있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서 데비 존스의 저승에 갇힌 잭이 결국 그의 정신적 분신들을 맞이하는 것은 육체적 모험에서 시작한 이 영화가 정신적 모험으로 분기되는 지점까지 나아갔다는 뜻이다. 그건 요즘 판타지영화의 일종의 유행이기도 하며 영웅 신화가 마지막에 차지하려는 어떤 자리이기도 하다(가깝게는 <스파이더 맨>을 봐도 그렇다). 그러나 이런 공유보다 더 중요하게 말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차이다.

<스타워즈>가 제다이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때 희미해질 수밖에 없는 인물은 해리슨 포드가 연기한 한 솔로다. 제다이 신화의 주요 조력자인 이 괴팍한 성격과 쓸 만한 농담을 지닌 사내는 그러나 무엇보다 제다이의 영웅적 피가 흐르는 자가 아니다. 조금 과장해서 그를 설명하자면 어쩌다 영웅이 된 그는 본래 우주의 삼류 건달쯤 될 것이다. 물론 그가 숭고한 신화를 완성하는 결정적 일원이 되지만 그는 결국 제다이가 아니므로 신화의 변방에 남는다. 잭은 보면 볼수록 해상으로 귀환한 한 솔로의 환생 내지는 그에 관한 외전 캐릭터인 것처럼 보인다. 만약 이 시리즈가 어떤 세습적 전통에 매달렸다면 해적 잭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등장했다 하더라도 잭은 윌의 뒤에 서서 조력자로 남았겠지만 지금 이 시리즈는 그런 전통을 거스르고 있다. 게다가 더 주목할 만한 건 3편에 이르러 보니 해적의 피를 이어받은 윌이 해적의 모든 무리를 지휘하는 해상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그의 연인 엘리자베스가 그 자리에 오른다는 설정이다.

동시에 정신적 차원에서도 이 시리즈는 <반지의 제왕>과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데, 프로도의 정신성이 절대 악을 물리치기 위해 필요한 절대 선인 것에 비해 잭의 정신성은 그 누구도 꿰뚫어보기 힘들 만큼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분열의 심연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반영하기 위해 여러 분신이 출현한다. <스타워즈>와 <반지의 제왕>에 빗대어 볼 때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는 어느 모로 보나 외전의 서사를 펼친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 말은 이 시리즈가 위반을 가장 큰 미덕으로 삼는 캠프적 감성에 빚지고 있거나 흉내내고 있다는 뜻이다. 한때 조지 루카스와 피터 잭슨이 당대의 캠프적 추종자로서 명성을 떨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며, 비교컨대 <캐리비언의 해적> 시리즈는 구식 캠프적 상업 감성에 대한 새로운 상업적 외전으로 등극한 것이다.

모든 것들로부터의 외전(外傳)

3편에서 위반의 열망은 확실히 더 강해진다. 일단 1편과 2편을 보지 않고 3편을 본다는 것이 무모해 보일 정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전편들을 모두 알고 본다 하더라도 구석구석 의문점은 수두룩하다. 윌이 빌 터너의 아들이고, 바르보사가 잭을 선장 자리에서 축출했을 때 반대했던 빌 터너가 바르보사의 손에 죽었고, 그의 영혼을 데비 존스가 거둬 하수인으로 만들었으며, 데비 존스는 바다의 여신 칼립소에게 배신당한 슬픔으로 자신의 심장을 망자의 함에 넣고 바다를 누비는 괴인이 되었고, 결국 2편 마지막에서 그의 심장을 탈취한 노링턴 제독이 동인도 회사의 베켓 경에게 데비 존스의 심장을 바침으로써 데비 존스가 베켓의 수하가 되면서 3편은 시작됐다. 베켓-데비 존스와 나머지 그들을 물리치려는(그러나 제각각 다른 꿍꿍이가 있는) 해적 연합의 대결구도로 3편은 전개된다.

이 안에 얽혀 있는 많은 관계와 각자의 이익 추구가 3편의 본령이다. 그걸 다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3편이 유독 매우 엉성하거나 복잡해 보이는 이유가 인물들간의 끊임없는 배신에 있다는 점은 말해야겠다. 더불어 그것은 단순히 배신이라고 말하기 힘들며 항상 그 배신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협약과 규율을 맺는 것과 그것을 파기하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걸 같이 말해야겠다. 3편의 거의 모든 서사의 동력은 지정된 율법을 깨고 엎는 것을 기점 삼아 굴러간다. 그러면서 인물들은 적과 아군을 번갈아가며 자처하고, 당연하게도 관계는 모호하고 지연되고 응집되지 않은 상태로 지속된다. 3편이 어리둥절하게 보이는 것은 막무가내로 서사를 덧붙임으로써 그 자체로 뚫려버린 구멍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이 이상한 관계를 영화가 지속적으로 용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때 해적들이 벌이는 이합집산의 관계 혹은 동인도 회사 대 해적이라는 구도를 국제정치학이나 사상성의 은유로 읽어내려는 단순화된 욕망 내지는 상상이 생길 만도 하다. 가령 해적들의 무리를 무정부주의자들끼리의 맹약으로 본다거나 영화 속 관계 구도를 미국 정부 대 소수 국가 연합의 대치라는 무의식적 반영으로 읽는 것 등이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적 낭만으로 설명하기에 영화 속 인물들은 행동강령에 대한 거의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으며, 무정부주의건 무엇이건 그 어떤 가치도 신봉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정치세력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정치적 가치는 그들의 고려 대상이 아닐뿐더러 그들이 뭉쳐서 자유를 주장 할 때가 오히려 가장 상투적이다. 해적들이 자유로워 보일 때는 그들이 서로 속고 속이면서 쟁투할 때뿐이며 그때 영화도 덩달아 생기발랄하다.

해적들이 서로의 편을 매번 새로 짜고 옮길 때, 그건 갈등이 아니라 일종의 서로의 입장 차이를 갖고 기꺼이 노는 것에 가까워진다. 가령 2편부터 주요하게 부각된 동인도 회사는 실존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비유로서가 아니라 강대하고 전통적인 어떤 제도권의 상징에 더 가깝다. 각양각색 해적들이 동인도 회사와 싸울 때 그건 제도에 대한 철저한 비제도적 근거들로 맞서는 것이다. 이 영화를 쓴 각본가들이 “이 영화는 해적영화에 대한 해적영화”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그러므로 해적영화라는 전통과 제도의 관습에서 벗어난 외전으로서의 해적영화를 뜻하는 것이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의 계보에서 벗어난 새롭게 통속적인 인물과 관계의 창조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제도에 대한 가장 강렬한 저항을 꿈꾸는 것은 자주 캠프적 감수성이라고 불렸다.

디즈니의 캠프적 감수성 흉내내기

“교양과 도덕과 내용을 중시하는 소위 고정된 제도권과는 반대에 있는 것으로서 스타일과 즐거움과 자유를 중시하는 반문화적 성향”(김성곤, <사유의 열쇠>)이라고 캠프를 이해해도 좋을 것이지만, 그보다는 수잔 손택이 오래전에 말한 단장들 중 우리 마음대로 “캠프의 특징은 무절제의 기질이다” 혹은 “캠프는 도덕을 약화시킨다. 캠프는 도덕적 분노를 무효화하며 장난기를 떠받든다” 등을 가져와도 된다. 캠프란 거의 모든 규약에 대한 본능적인 위반의 욕망이며, 과장과 과잉으로 추구된 스타일이며, 미스터리 혹은 허점 내지는 결여에의 전복적 예찬이며, 양가성에 대한 지극한 인정이며, 변덕과 통속의 탐미적 수용이며, 언제나 의의와 내용에 대한 배제다. 그 모든 공인된 것들에 관한 찬란한 거부다. 퀴어 정치학과 캠프가 동석의 꿈을 꾸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는 위에 열거한 캠프적 감수성으로 꾸민 상업적 시연장이자 퍼포먼스다. 이미 성정체성의 후문에 휘말렸을 만큼 양가적으로 보이는 잭의 외양과 그에 못지않은 나머지 해적들의 마치 가면무도회를 연상시키는 복장과 화장술과 인상의 도착성. 중요한데도 중요하지 않은 척 다루면서 전개해나가는 이야기들의 허점. 가령, 바르보사는 윌의 아버지 빌을 바다에 떠민 사람인데 그 둘은 3편에서 내내 붙어다니면서도 한번도 그 문제를 입 밖에 내지 않는다. 혹은 싱가포르의 해적 샤오펭이 엘리자베스를 칼립소라고 인정하고 그럼으로써 그녀는 해적 왕에까지 오른 것인데, 정작 칼립소는 마녀 티아 달마로 밝혀진다. 엘리자베스가 어쩌다가 해적왕이 된 그 말도 안 되는 사연에 관해서 영화 속 어떤 인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혹은 난감할 정도로 조락과 회복을 오고가는 인물들의 어처구니없는 운명, 이를테면 노링턴의 급작스런 추락과 복권. 그리고 순교와 같은 죽음. 또는 갑자기 등장하여 우리를 놀라게 하는 잭의 아버지 티그 선장(잭 역할을 한 조니 뎁이 모델로 삼았다고 밝힌 키스 리처드가 이 역을 맡았다). 아버지에게 잭이 “어머니는요?”라고 물었을 때 아버지가 내민 어머니의 목이 의미하는 바는? 다시 말하지만 수없이 거부되는 공인의 약속들. 그럼으로써 이 모든 조각들을 모두 모아봤자 결코 구축되기 힘든 의미들. 정작 그것이 캠프라 할지라도 지금 우리가 맞은 것은 그 흉내라는 점.

디즈니랜드산 극장 내 롤러코스터 <캐리비안의 해적>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는 캠프적 감수성에 대한 시도였으되,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획기적으로 그것을 흡수 종속시켜 전유한 철저한 기획물 중 하나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도 이 영화에는 기특한 장난은 있지만 장난 위에 지어진 문화정치학이 눈씻고 봐도 없다. 우리는 그저 이 영화를 보고 잠시 노는 것인데, 그런데 어디서 노는 것인가. 이 시리즈를 거대 상업화한 시초가 디즈니랜드의 놀이기구를 서사화하는 과정이었다는 점. 우선 실제로 1편에서는 선원들이 공중으로 엘리자베스를 던져 올리는 장면이, 2편에서는 거대하게 굴러가는 수레바퀴에 매달려 싸우는 장면이, 3편에서는 좌우를 뛰어다니며 배를 전복시키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들은 하나같이 최면을 건다. 우리가 놀이기구를 탈 때의 그 짜릿한 공포, 즉 중력에의 위협을 즐기는 순간을 상기하도록 암시한다.

그러나 정작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디즈니랜드라는 모조적 논리 안으로 찌그러져 들어온 캠프적 감성이 우리를 가짜 카니발리즘의 상태로 유도한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그 감수성을 즐기는 건 카니발을 즐기는 마음이어야 할 텐데, 그걸 상업적 모조의 세계 안에서 전유할 때, 물론 즐겁게 놀라고 만든 영화이긴 해도, 우리가 지금 디즈니랜드의 투사 안에서 놀고 있는 것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는 편이 이롭다. 바꿔 말해, 만약 이 영화를 즐겁게 보았다면 그건 캠프적 감수성의 상업적 전유에 대해 동의하며 만끽한 것이거나, 스크린과 빛으로 뒤바뀐 수백개의 최면적 라이더를 극장 안에서 탄 것이거나, 그걸 지탱하고 있는 모조적 카니발의 세계에 탐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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