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續 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피아니스트> -소설가 천운영
2007-06-15
따뜻한 숨을 불어넣고 싶었던, 애절한 그 손 <피아니스트>

내가 여고생이었을 때. 지금 생각해보면 나른한 오후의 교실과 과학책 밑에 숨기고 읽었던 하이틴로맨스 몇권만 떠오르는 여고 시절. 등하굣길 출몰하는 ‘바바리맨’의 풍문만으로도 꺅꺅 소리를 지르던 때. 목덜미에 대일밴드를 붙인 날라리들이 어쩐지 특별해 보이던 때. 키스나 섹스라는 말만 들어도 몸이 배배 꼬이던, 아마도 사춘기였을 18살 무렵.

그때 내가 접한 성과 사랑에 대한 정보는 <숲속의 장미>나 <해변의 연가> 같은 하이틴로맨스류의 책들, 입담 좋은 계집애들이 전해주는 음담패설, 그리고 몰래 보던 18세 관람가 영화가 전부였다. 당시 제일 야하다고 소문난 영화 비디오를 빌려 부모님이 안 계시는 빈집으로 몰려가곤 했었는데, 그것은 나와 내 친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것들 사이의 간극은 컸다. 하이틴로맨스는 낭만적이고 부드럽고 환상적인데 비해, 남자 중심으로 진행되는 음담패설은 더럽고 구질구질하고 역겨웠다. 그리고 영화는 너무 자극적이고 과장되고 무서웠다. 참고적으로 당시 제일 야하고 충격적이라고 해서 빌려왔던 영화가 <양철북>이었는데, 말대가리를 파고들던 장어와 소리를 질러대던 난쟁이 양철북 소년 때문에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간극 사이에서 내가 가장 선호했던 것은 하이틴로맨스. 인근 만화가게에 있는 모든 하이틴로맨스를 섭렵한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할리퀸이었다. 내가 하이틴로맨스를 좋아했던 것은 두세번, 많게는 네댓번 나오는 주인공 남자와 여자의 성적 장면 때문이었다. 배꼽이 찌릿하는 것을 신호로 위장이 밑으로 쑥 빠져나가면서 가슴이 철렁, 그리고 긴 한숨. 그 과정 끝에 남는 근질거림. 내게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현실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 유일한 자극이 있었다면, 그것은 버스 손잡이를 잡은 남자의 손이었다. 곱지만 강인해 보이는 완벽한 남자의 손.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 짧게 깎은 손톱, 살짝 튀어나온 힘줄, 마디 가운데 난 몇 가닥의 털. 바로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그 손에 대고 몰래 뜨뜻한 숨을 내뱉었던 것을 남자는 알았을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아니 그 무렵 나이만큼 더 나이를 먹은 지금까지도 나는, 그런 손만 보면 배꼽이 짜릿하고 뜨거운 숨이 나온다.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는 18살 무렵의 <숲속의 장미>와 <양철북>이 공존하는 영화였다. 영화 타이틀이 나오기 전 툭툭 끊기듯 등장했던 피아노 치는 손들. 나는 영화 시작부터 헉, 숨을 참아야만 했다. 그것은 버스 손잡이를 잡은 남자 손에 예술적 환상까지 곁들인 로맨스적인 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섹스숍에서 포르노를 보며 정액 묻은 휴지를 코에 대는 에리카의 모습에서부터 여지없이 무너진다.

면도날로 자신의 성기에 상처를 내고, 카섹스를 훔쳐보며 오줌을 싸고, 유리컵을 깨 학생의 옷 주머니에 넣고, 자신을 묶고 때리고 강간해달라고 애원하고, 사랑한다며 엄마를 덮치는 에리카를 보면서, 클레메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당신은 미쳤다고, 내 눈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고, 나를 역겹게 했다고, 당신은 마녀고 변태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어쭙잖은 해석을 해보겠다고 들이댔던 욕망과 억압, 재능과 희생, 진부와 왜곡 같은 잣대도 거두었다. 시종 침착함을 유지하는 에리카의 표정 때문이었을까? 시종 무표정했던 얼굴에 언뜻 드러나는 미묘한 떨림과 불안한 눈빛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에리카의 손을 잡고 싶었던 것이다. 버스 손잡이를 잡은 남자의 손이 아니라 에리카의 손에 따뜻한 숨을 불어넣고 싶었다. 창고 바닥에 내팽개쳐진 채 내밀었던 그 손을 클레메 대신 내가 잡아주어야 했다. 슈베르트를 연주하는 손, 제 성기에 상처를 내는 손, 억압의 근원인 엄마의 따귀를 때리는 손, 젊고 자신감있는 남자를 밀쳐내는 손, 그리고 허공에 내민 애절한 손.

천운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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