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나의 열세살, 수아와 똑같았다”
2007-06-13
글 : 김도훈
<열세살, 수아>의 추상미

십여년도 더 된 이야기다. 초창기 <꽃잎>과 <접속>의 추상미를 보면서 나스타샤 킨스키를 떠올린 적이 있다. 광기어린 재능을 불태웠던 천재 배우의 딸이자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가는 아름다운 여우의 이미지. 억지로라도 겹쳐서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추상미라는 배우가 킨스키만큼이나 풍요로운 역할을 한국 영화계에서 선사받은 적이 있었던가. 글쎄. 그녀가 무대에서 뿜어내는 열정에 도취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각 프레임을 답답해하는 추상미의 에너지에 아쉬워해본 경험 또한 있을 것이다. 게다가 추상미의 작은 인디영화 <미소>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멀티플렉스의 논리에 의해 제대로 관객을 맞이할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2007년은 배우 추상미에게 새로운 출발점이다. 열세살 소녀의 억척스런 어미를 연기한 <열세살, 수아>와 거의 동물적인 매력으로 정자라는 캐릭터를 재발견한 <사랑과 야망>. 두편의 영화와 드라마는 추상미라는 배우가 지탱할 수 있는 세계의 넓이가 충분히 넓다는 걸 시원스레 보여준다. 그래서 연극 무대에서 목도했던 선 굵은 에너지의 주인공이 시원스런 보폭으로 걸어오길 기대하고 있었다. 웬걸, 세밀한 선을 지닌 작은 여자가 조용히 다가온다.

-<프루프> 연극으로 처음 실물을 봤다. 무대에 섰을 때는 상당히 커 보였는데….
=다들 만나면 놀란다. 작고 왜소하다고. 특히 얼굴 크기에 놀란다.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작다고. (웃음) 왜 이 세상에 나를 위한 카메라는 없는지. <열세살, 수아>는 어떻게 보셨나.

-좋았다. 개인적으로 참 마음이 가는 영화였다.
=시사 이후 반응이 좋아서 좀 놀랐다. (웃음) 사실 기술시사 보고는 조금 불안하기도 했는데, 시나리오가 워낙 좋았거든. 영화 역시 최선으로 나오긴 했지만 저예산이다보니 어쩔 수 없는 한계들도 있지 않나 싶다. 연출의 실수가 아니라 제작비의 문제다.

-처음엔 역할을 거절했다고 들었다.
=시나리오 읽기 전에 매니저가 브리핑을 먼저 해준다. 그걸 듣자마자 절대 안 한다고 못박았다. 열세살짜리 엄마를 하라고? 미쳤어? (웃음) 역할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열세살짜리 엄마를 연기할 만한 감성이 전혀 없었거든. 그런데 영화를 기획한 민규동 감독의 친구인 김태용 감독이 전화로 날 꾀더라. 그 사람의 영화 보는 눈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다시 읽어봤다. 사실 김태용 감독은 끝까지 설득하지도 않았다. 열세살짜리 애 엄만데… 못하겠지? 그래그래 못할 거야. (웃음)

-참 보기만큼 소심하시네.
=되게 소심하시다. (웃음) 어쨌든 그 덕분에 다시 읽는데, 엄마가 아니라 수아의 감성에 몰입되기 시작하더라. 내 열세살 때 모습과 완전히 오버랩됐다. 열세살 때 아버지(연극배우 추송웅)가 돌아가셨고, 그때 지녔던 상실감과 사춘기 시절이 수아와 딱 겹쳐버렸다. 수아처럼 나 역시 현실과 판타지를 제대로 구분 못했었거든. 구름 위를 걸어다니는 느낌으로 살았다고 할까. 수아가 그걸 똑같이 겪고 있는 거다. 아주 애절하게.

-예술적 감수성이 많은 애들은 사춘기를 더 진하게 겪나보다.
=심하게 연예인에게 빠지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 (웃음) 꿈만 꾸면 마이클과 대화를 하고, 심지어 그를 만나기 위해 조기 유학 보내달라 징징거리고. (웃음). 그게 나의 열세살이었다. 그래서 <열세살, 수아>에 출연한 거다. 엄마 역은 하나도 탐나지 않았고 순전히 상대역인 수아가 탐나서 출연한 거라니까. 아. 수아 역을 시켜주면 더 잘했을 텐데. (웃음)

-수아 역을 못해서 아쉽겠지만, 하여튼 맡은 역할은 열세살짜리 딸을 가진 억척 엄마니 뭐….
=모성애를 이해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게 너무 힘든 거다.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엄마가 그러더라. 나도 모성애는 말로 설명 못해. 그냥 네 자궁에서 떨어져 나온 게 수아라고 생각해봐. 사실 나에게 그런 느낌은 키우던 강아지나 고양이밖에 없었는데, 걔네들보다 100배 더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봤다. 어느 순간 조금씩 오더라. 조금씩 수아가 내 새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밀양>의 전도연도 모성애를 표현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더라.
=정말 인간이 체험하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몇 가지 있으니까. 이번에 시작한 드라마 <8월에 내리는 눈>도 모성애가 포인트다. 아이를 죽인 뺑소니 운전사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여자의 이야기다.

-계속해서 모성의 고통을 연기하는 셈이네.
=아이가 죽는 장면에서도 직접적으로 모성애를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더라. 하지만 <열세살, 수아> 다음에 이 역할을 맡게 되어서 조금 도움이 된다.

-이번 영화도 개런티를 아주 적게 받고 출연한 것으로 안다.
=그거 배우한테 아주 좋은 일은 아닐 수도 있는데. (웃음) 그저 좋은 작품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 가능했던 것 같다. 개인적인 성격이다.

-평소에 많이 퍼주나. 손해도 많이 보면서 살겠다.
=잔정은 없는데 한번 퍼주면 크게 퍼준다.

-그건 어느 분에게서 물려받은 기질인가.
=글쎄, 모르겠다. 말 들어보니 아버지는 후배들에게 절대 크게 안 쏘는 굉장한 노랑이였다던데. (웃음)

-그런데 말이지, 작은 규모의 독립영화들에 출연하고 나면 그 결과들에 모두 만족하는 편인가.
=사실은 그것 때문에 <열세살, 수아>도 거절했었다. 솔직히 결과가 좋았던 적이 별로 없으니까. 영화의 질적인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일단 개봉을 제대로 해야 보람이 느껴질 텐데 개봉도 잘 못하고 묻혀버리니까 되게 속상하더라.

-신인감독과 작업을 꽤 많이 한 편이다.
=김희정 감독은 쓸데없는 치장이 없고 정말 필요한게 뭔지 잘 안다. 사실 저예산이라는 여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도 되는 부분도 과감히 포기할 줄 안다. 좋은 학교 나왔기 때문에 영상에 대한 욕심도 있을 텐데 과감히 버릴 부분은 버리고 배우들의 연기 호흡만 확실히 잡고 가더라. 여자감독들은 사실 그러기가 힘들다. 사소한 것에 엄청 고집들을 부리기도 하거든. (웃음)

-이름을 거론하긴 힘들지만 몇몇 여성감독들의 고집은 꽤 유명하다. 그런데 감독이 독해야 영화가 잘 나온다는 속설도 있지 않나.
=그러게. 나도 걱정이 됐다. 근데 사람이 인덕이 있는지 스탭들과 전혀 불화가 없었다. 그리고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나에게 DVD를 잔뜩 안겨주더라. 그중에서도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라는 영화가 너무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이 사람도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감성적인 교감과 신뢰가 있는 상태에서 들어간 영화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연극 <프루프>를 지난해에 봤는데, 천재 아버지의 후광을 벗어나서 자신만의 능력을 찾는 소녀 캐서린의 이야기다. 개인적인 이야기처럼 보였다.
=나를 캐스팅했던 이유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런가. 별다른 노력도 없이 저절로 캐서린이 되더라.

-97년에 <키노>와 했던 첫 번째 인터뷰에서 “나를 통해서 아버지를 기억해주는 건 좋은 일 같다”고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인터뷰마다 아버지 이야기를 질리게 들었을 텐데, 여전히 어떤 무게가 느껴지나.
=글쎄. 아버지 그늘에서 독립한다는 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아버지는 일종의 기인이었으니까.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이 만들어진 과정을 담은 일지나 자서전을 보면, 정말이지 객관적으로 봐도 천재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치게 빨리 에너지를 소모하는 바람에 그처럼 빨리 가신 게지. 아유. 나는 그렇게 될 생각없다. 평범한 배우다. 정신적인 부분에서 물려받은 피는 있을 거다. 그건 부인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인생을 빨리 소모할 생각은 없다. 최대한, 가늘고 길게. (웃음) 오래오래. (웃음)

-가늘고 길게. 그건 내 인생의 목표이기도 한데.
=(웃음). 데뷔했을 때도 스타가 되거나 큰돈을 벌 생각은 없었다. 뭐, 나도 명예욕은 좀 있지만, 왜 이렇게 물질욕이 없나 몰라. 사적인 모습에서 아버지를 많이 닮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영화에도 출연하고 드라마도 하다보니 스스로를 아티스트라고 하기도 좀 그랬고 연예인이라기도 좀 그래서, 그 중간에서 참 힘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뭐래도 아티스트라는 확신을 가지려고 한다. 아니, 이미 확신을 갖고 있다. 난 아티스트다. 그런 믿음으로 일을 한다.

-드라마에서도 아티스트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지난번 <사랑과 야망>의 정자 역할 같은 것. 드라마 웹진 <매거진t>는 “원작에서 잠깐 등장하고 사라진 캐릭터를 새롭게 후반부까지 몰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추상미의 연기와 캐릭터 해석력 덕분”이라고 했다. 그만큼 좋은 연기였다.
=김수현 선생님도 가장 많이 바꾼 캐릭터라더라. 원래 대본을 바꾸는 분이 아닌데. 사실 처음에는 선생님과 트러블이 좀 있었다. 대본이 1회에서 6회까지만 나왔는데, 대본만 보니까 정자라는 애가 그냥 귀엽기에 귀엽게 연기했다. 선생님이 전화로 “너는 왜 이 역할을 이용하려고 하느냐”며 엄청 야단을 쳐댔다. 밉상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 밉상을 만들까 고민하다가 무표정한 상태의 얼굴 모양을 바꾸면 좋겠다 싶어서 인중을 치켜든 상태로 모든 대사를 했다. 약간의 변환데 화면에서는 그게 아주 달라 보인다. 사실 아버지의 변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변신이란 건 나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그런 노력이 보일 수 있는 역할을 별로 받아본 적이 없다는 거지. 항상 도회적이고 지적인 커리어 우먼들. 너무너무 싫었다. 이럴 바에는 연기할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년 반을 쉬고 나서 맡은 역할이 드라마 <변호사들>의 역이었다. 작은 역이지만 변화를 줄 수 있는 역할이었다. 그러고나서는 또 <결혼합시다>에서 코미디 연기를 했다. 그 이후에야 점점 변신할 역할들이 들어오더라.

-처음으로 연기를 즐겼던 순간은 무슨 영화나 드라마부터였나.
=글쎄. 아무래도 <생활의 발견> 아니었을까. 릴랙스하는 법을 배운 거지. 좋은 연기라는 건 아버지가 구사하던 것처럼 선이 굵은 표현주의 연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관념이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으니까, 무대 위에서는 제대로 발산이 되는데 카메라와는 교류가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데뷔 초반에는 확실히 연기가 너무 연극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던 것으로 안다.
=어린 시절부터 받아들인 무의식이니까. 그게 부숴진 게 <생활의 발견>이다. 홍상수 감독은 나라는 인간을 끌어냈으니까. 연기와 내 삶을 분리시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배우가 할 일은 연기와 삶의 중간 지점을 향해 가는 건데, <생활의 발견> 때는 정말 내 삶을 연기해야만 했다.

-그건 좀 고통스러운 일 아닐까.
=그런 건 분명 있었다. 연기가 삶에 근접할수록 물론 좋은 연기가 나오겠지. 하지만 개인이 스크린에 모조리 까발려진다는 것은 배우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런 부분에서 지금도 그 영화를 보기가 조금 힘들다. 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정사장면에서 말론 브랜도가 10분간 과거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지 않나. 베르톨루치 감독의 요구로 진짜 자신의 과거를 읖조린거라더라. 근데 브랜도는 그 영화 찍고나서 너무 불쾌해서 다시는 베르톨루치와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지난 이야기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벗겨진 기분이 들었던 건가.
=영화 찍을 때는 잘 모른다. 근데 촬영이 끝으로 가면서 좀 불안해지고, 영화를 보면 볼수록 더 벗겨지는 기분이 든달까. 홍상수 감독은 배우를 엄청 관찰한 다음 배우 개인의 모순을 끄집어내거든. 내게서는 아마도 지적인 허영심 같은 걸 보셨던 걸까.

-지적인 배우라는 이미지, 연구를 많이 하고 연기한다는 이미지는 있다. 이건 뒤집어보자면 동물적으로 연기하는 게 좀 덜하다는 느낌이기도 한데.
=사실 내가 동물적인 감각을 개발하는 것을 좀 두려워하긴 했다. 다만 <사랑과 야망>을 하면서는 정자라는 인물이 동물적이어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감각을 발휘해보자 싶었다. 사실 김수현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대사만 100번씩 보고 촬영에 들어간다. 그런데 토씨 하나 안 틀리려고 노력하다보면 동물적으로 연기하기가 힘들다. 딜레마였다. 그래서 대사를 많이 외운 다음 촬영 당일엔 그냥 잊어버렸다. NG가 나도 그냥 가자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사실은 나 역시 대단히 동물적인 감각을 갖고 있구나 싶더라. 그런데 이런 것도 있다. 오래전에 한 제작자로부터 “여배우는 앉은자리에서 눈물 또르르 흘리고 돌아서면 빵긋 웃기만 하면 된다. 너처럼 머리가 발달해서 무슨 배우가 되겠냐”고 야단을 맞은 적이 있다. 근데 아무리 동물적인 감성으로 울고불고 할 능력이 있더라도, 캐릭터를 분석하고 자신을 변화하려면 여배우 역시 지성이 필요하잖나.

-지금은 지적인 이미지를 확 다른 것으로 풀어내는 시기일까. 시나리오들은 어떤 것들이 주로 들어오나.
=<열세살, 수아> 이후에 좋은 시나리오가 들어올 거라고 기대를 좀 하고 있다. 나는 작은 영화가 좋다. 거대한 플롯이 아니라 사소한 감정들을 보여주는 영화들 말이다. 그래서 <열세살, 수아> 같은 영화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사소한 것들의 중요함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왜 한국에는 이렇게나 드물까.

-출연하고 싶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직접 쓸 생각은 없나. 디자이너 헬무트 랑은 자기가 입고 싶은 옷이 세상에 없어서 의상디자인을 시작했다더라.
=시나리오를 써본 적은 있다. 끝까지 완성해본 적은 별로 없지만. 여전히 시나리오를 써볼 생각은 있다. 프랑스 감독인 아녜스 자우이를 되게 좋아한다. 내가 딱 좋아하는 영화가 그런 거다. 아무 이야기도 아닌 듯하지만 중요한 것을 말하는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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