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VD 커버가 황홀하게 예뻐서 혹시 향수를 뿌렸나 싶어 코를 대봤다. 그러나 냄새가 날 리 만무하다. 마찬가지로 영화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에서 향이 나올 까닭이 없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다 향을 맡은 듯한 착각에 빠졌다.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가 만든 향수가 흡사 후신경을 건드린 것 같았다. <향수…>는 향에 영혼을 판 천재의 탄생, 성공과 실패 그리고 소멸에 관한 이야기다. 오래전 읽은 기억으론, 소설 <향수>는 분명 스릴러나 블랙코미디영화를 위한 소재였다. 그런데 영화로 다시 만난 <향수>는 사라진 천재의 시대를 아쉬워하는 연대기로 읽힌다. 18세 중엽 프랑스에서 전개되던 이야기는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기 전, 한 남자가 살점 하나 남김없이 뜯어 먹힌 흔적 위로 보통 사람들이 오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평등과 복제와 산업이 지배자로 행세하는 시대엔 천부적인 재능과 순결한 영혼은 곧 고독과 외톨이를 의미한다. 하늘마저 시기한 그들은 도태와 멸종의 삶을 선택해야만 했고, 우리는 진정한 천재가 부재하는 심심한 시간을 살게 됐다. 몇년 전, <향수>의 주요 배경인 프랑스의 산악 마을 ‘그라스’에 간 적이 있다. 향의 명인들이 지켜온 향수의 도시는 지금도 향수의 본고장으로 자리하고 있으나, 내 눈엔 한적하고 아름다운 관광지 이상이 아니었다. 어딘가 맥빠진 도시는 바로 우리 시대의 모습이었다.
DVD의 영상에 대해 잘라 말하긴 힘들다. 어둡고 야만적인 시대의 분위기를 살린 <향수>의 필름 영상은 말끔하고 선명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영화를 스크린으로 먼저 보았다면 DVD의 영상에 대해 (어두운 부분에서 푸른색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현상을 빼면)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겠으나, DVD로 <향수>를 처음 접할 경우엔 다소 낯선 경험일 수도 있겠다. 특별판으로 제작된 <향수> DVD는 본편 음성해설을 지원하지 않는 대신 두 번째 디스크에 150분이 넘는 다양한 부록들을 수록했다. 그중 메이킹 필름(53분)에선 유럽산 대중영화를 만들었다는 제작진의 자부심이 물씬 풍겨난다.
빔 벤더스의 <그릇된 동작> 이후 60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해온 번드 아이킨커가 소설 <향수>를 접한 다음 20년 가까이 영화화에 쏟은 각별한 노력이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가운데, 15년 넘게 판권 거래를 거절한 파트리크 쥐스킨트(그는 1990년대 말에 쓴 <로시니>의 시나리오 안에 ‘나는 내 책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라는 대사를 집어넣을 정도였다)와 줄다리기를 벌인 사연, 미국 자본의 도움없이 영화를 만들게 해준 축구단 구단주와의 인연, 18세기 배경의 시대극을 제작하느라 수많은 제작진이 기울인 정성, 500m 근방만 가도 악취가 진동했다는 끔찍한 촬영장소, 톰 티크베어 감독이 런던의 연극 무대에서 <햄릿>을 공연 중이던 벤 위쇼를 발견하게 된 과정, 피날레의 군중장면을 위해 스페인 극단 ‘라 푸라 델스 바우스’의 단원들이 진흙을 바르고 임한 이색적인 연습, 현존하는 최고의 지휘자 중 한명인 사이먼 래틀과 베를린 필이 영화음악을 연주하는 광경 등이 꼼꼼하게 담겨 메이킹 필름의 몫을 다하고 있다. 또한 제작자, 감독, 배우들과의 인터뷰(42분), 프랑스와 스페인을 오간 로케이션 헌팅(11분), 냄새의 시각화 작업(13분), 촬영에 쓰인 독특한 기법들(11분), 수백 가지에 이르는 음원의 믹싱(10분) 같은 부록들도 메이킹 필름과 연결해볼 만하다.
그 외에 ‘독일어 더빙 현장’이란 부록(10분)은 한국판 DVD 속에 놓기엔 좀 생뚱맞긴 하지만, 그 내용을 이모저모 살펴보면 재미있는 구석이 없지 않다. 우두커니 서서 목소리만 내는 게 아니라 현실감을 살리고자 다양한 연기를 펼치는 성우들과, 더빙하는 스튜디오까지 찾아와 성우들의 음성 연기를 일일이 지도하는 감독의 얼굴에서 예상 밖의 현장을 찾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