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배우와 감독 사이의 시간
2007-06-21
글 : 이영진
사진 : 오계옥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의 김선재

김선재는 잊혀진 이름이다. 1996, 97년만 해도 그녀는 주목받는 신인 여배우였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으로 <씨네21>의 표지를 장식했던 것도 이 무렵.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등에 거푸 출연하며 백상예술대상, 영화평론가협회상 등을 받았던 그녀는 그러나 이후 결혼과 함께 배우 생활을 접었다. “한번은 큰딸이 예전에 <아름다운…> 비디오 재킷을 보고서 왜 딴 남자랑 누워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엄마 일할 때 찍은 거야, 하고 서둘러 궁색한 변명을 하긴 했는데….” <말아톤>에서 초원이의 담임선생님으로 잠깐 나온 것을 빼면, 지난 10년 동안 김지현 감독의 단편 <연애에 관하여>(2000)와 곧 개봉하는 전수일 감독의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 출연작의 전부다. “찍으면서도 개봉할 줄 몰랐어요. 감독님은 이 말 들으면 서운해하실지 모르지만.”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의 영화 역을 제의받았던 때가 2004년 가을. 둘째딸이 젖 떼고 제 걸음 걷기 시작해서 큰맘먹고 강원도 촬영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캐릭터를 잡을 때는 감독님과 일치를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구나 싶었어요.” 영화라는 인물은 어릴 적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다니는 것이 일상인 여자. 김선재는 “미필적고의로 동생의 손을 놓아버린 여자를 감독님은 억눌린 인물로 그리고 싶어했고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인물로 해석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노래를 부르는데 키를 잘못 잡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중간에 내 음역대로 바꿔야 하는데 어물쩡어물쩡 넘어갔죠. 결국 노래를 억지로 부른 셈이 돼버렸고 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럽죠.”

지난 10년 동안 배우 김선재로서 소홀했던 건 감독 김선재를 꿈꿨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철딱서니가 없었어요. 계획한 대로 의도한 대로 모든 것이 짜일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과거 그녀가 맡았던 인물들처럼, 그녀는 또렷한 자의식의 소유자였다. 온갖 배역들이 밀려들 무렵 그녀는 “배우가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꼭두각시 아닌가” 하는 회의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해 호주로 훌쩍 떠났다. “아이 낳더라도 공부하면 감독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쉽나요.” 외국에서 영화학교에 다닐 생각도 해봤지만 결국 “스스로 여건을 만들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결실이 없었던 건 아니다. 2001년에 직접 쓴 시나리오로 단편 <인어>를 만들었고, 그해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상영됐다. “반응은 뭐 별로. 남편이 제작비 오버된 것을 흔쾌히 내줬죠. 금액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웃음)” 남편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최근 <눈부신 날에>의 편집을 맡았던 김양일씨. “남편은 호주에서 어렸을 때부터 살아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잘 몰라요. 나와 다르게 할리우드 장르영화를 좋아하는 편이고. <인어>를 보면서도 저건 무슨 뜻이야, 왜 저러는 거야 계속 물어봤어요.”

결혼하고, 아이 낳고, 감독하고, 뜻 맞는 친구들을 만나는 동안 그녀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 한결 편해졌고 유들유들해졌다”지만 그럼에도 “어떤 순간에선 예전의 완고함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올해 개봉한 모 영화에 엄마 역으로 출연했다가 도중 그만두고 나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촬영회차가 늘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도중에 감독이 교체된 연유도, 촬영 전날 새 감독이 갑자기 와서는 “영화에서 여자 인물은 유일하니까 좀더 여성적인 연기를 해달라”는 요구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그는 “인간관계에 대한 영화를 찍으면서 벌어진 일이라 더 참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앞은 번지르르한데 뒤에서 다른 짓 하는 걸 못 견디는 체질인가봐요.” 남이 그려놓은 지도 위를 걷고 싶을 때는 배우를, 가끔 모든 것을 주관하고 싶을 때는 감독을 하고 싶다는 그는 “술래도 하고 싶고 숨고도 싶다”며 자신의 마음을 술래잡기에 빗댄다. “제가 원래 좀 느려요. 주위에서 그동안 뭐했냐, 앞으로 뭐할래, 하고 물으면 스스로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굼벵이 속도여도 앞으로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요.”

화장도 안 하는 배우 그때는 무슨 배짱이었나 싶어요. 배우로 활동할 10년 전에는 화장 안 하고 다닌다고 타박 많이 들었거든요. 네가 혁명가 자식이냐는 말까지 들었어요. 시상식장에 드레스 한번 입고 가면 다들 “누나 왜 그래?” 그랬고. 시건방 떤 것 아닌데 어른들 보시기엔 별로 안 좋았나봐요. 오늘은 물론 화장했죠. 과거에는 피부라도 좋았지. 그때는 제가 좀 젊었잖아요. 지금은 맨 얼굴 내면 민폐예요.

10년째 나쁜 엄마 아이 가진 뒤에야 제 성격이 나쁘다는 걸 알았어요. 참을성도 없고. 나를 재발견한 거죠. 전엔 식당에서 떠든다고 화내는 부모 보면 뭐 저런 것 가지고 그러나 싶었는데. 지금은 남의 말 못하는 처지가 됐어요. 게다가 방이 좀 지저분해야 애들 정서에 좋다는 말 앞세워서 청소 안 하고 시나리오 붙잡고 있는 걸 보면 나쁜 엄마 맞죠?

언젠가 데뷔 감독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촬영 때 감독님이 덜렁 주먹밥 돌리시고 채근하신 적이 있어요. 눈밭에서 눈물 젖은 주먹밥 먹는데….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을 보는 분들 보면 대단하죠. 김응수 감독님도 그렇고. 지금 작업도 그런 경험 때문에 가능한 건가. 어쨌든 지금 쓰는 건 판타지호러예요. 무쇠를 먹는 불가사리 민담에서 모티브를 따왔어요. 괴수영화, 아니에요. 장 피에르 주네의 영화 분위기였으면 싶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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